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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저 구멍은 누구의 것이냐?

IP : f005234bab57511 날짜 : 조회 : 4209 본문+댓글추천 : 2

며칠만 쉬어 가려던 계획이 달포가 지남에 따라 김삿갓은 마음이 밖에 있어 온 몸이 쑤셨다.


(사또에게 떠난다고 작별인사를 한다고, 그러라고 하진 않겠고... 어떡하든 붙잡으려 할 텐데...

제일 좋은 방법은 아무 소리도 없이 슬쩍 도망을 가버리는 것 밖에는 없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다진 김삿갓이 슬며시 빠져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어느 날...

사또가 불시에 찾아와 이렇게 말을 한다.


"선생이 심심하실 테니 이제부터 재판구경이나 하시죠.

오늘은 매우 흥미로운 재판이 있을 예정입니다."

"흥미로운 재판이라뇨?"


가뜩이나 심심하던 김삿갓에게는 사또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러 건의 재판이 밀려있는데,

그중에서 유뷰녀가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고발당한 사건도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법 흥미가 있을 듯하오니, 선생은 제 옆에서 구경을 하고 계시다가

제가 판결을 잘못 내릴 경우에는 옆에서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삿갓은 남의 재판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사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난처하여 사또를 따라 동헌으로 나왔다.

이윽고 사또는 동헌 마루에 올라앉더니,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고발을 당하고 끌려온 여인을 굽어보며 준엄한 어조로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어엿한 남편이 있는 몸으로 그의 눈을 속여 가며 외간 남자와 계속 통정을 하였다니

우리 사회에는 삼강오륜이 뚜렷하거늘 유부녀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사또 앞에 죄인으로 끌려나오면 누구나 겁에 질려 몸을 떨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의 여인은 떨기는커녕 눈도 하나 까딱 않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이 보였다.


여인의 옆에는 남편인 듯싶은 사내 하나가 웅크리고 서 있었는데,

몸을 떨고 있는 사람은 끌려나온 죄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계집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저렇게도 당돌할까 싶어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사내들이 욕심을 부릴 만큼 교태롭게 생긴 계집이었다.

(계집이 예쁘고 교태롭게 생기면 얼굴값을 한다더니,

저 계집이야 말로 사내들을 호려먹게 생겼구나.)


사또는 심문에 응하는 죄인의 태도가 매우 불량해 보이자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어찌 대답이 없느냐?"

​죄수는 그제서야 얼굴을 똑바로 들더니 사또의 얼굴을 말끔히 올려다보며 앙큼한 대답을 한다.


"쇤네가 외방 남자와 정을 통해온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남편을 속여 가며 정을 통해 온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쇤네의 행실은 남편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온데,

새삼스럽게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사또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남편 되는 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의 허락을 받고 바람을 피웠노라 말을 하는데 사실이냐?"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머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집사람이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 오고 있는 사실을 소인도 알고 있기는 하옵니다만,

소인이 그러한 행실을 허락해 준 일은 결단코 없사옵니다."


사또가 그 말을 듣고 호통을 내지른다.

​"예끼 이 못난 놈아!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면 가랑이를 찢어 놓을 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계집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관가에 고발은 왜 했느냐?"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또 전에 호소를 하게 된 것이옵니다.

사또 어른께서는 소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기가 막힌 소리다....


사또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어쩌면 저리도 못난 사내가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또는 계집의 행실이 생각할수록 괘씸타 여겼는지 계집을 굽어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도 지금 들은 바와 같이

네 남편은 네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도록 허락해준 일이 한번도 없었노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남편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는 아직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계집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얼굴을 들더니 사또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또 전에 한 말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가 알고 싶으냐.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러자 요망한 계집이 따지듯이 말을 하는데,

"쇤네 몸에 달려있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이옵니까."


이에 사또는 분노가 폭발하여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네 이년! 아가리 닥쳐라.

그것이 네 남편의 소유물이지, 그것이 어째서 네 물건이란 말이냐!"


사또와 죄수가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언쟁이 벌어지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또가 과연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무척 궁금하였다.

 

과연, 사또는 말끝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말재주를 부리며 빠져나갈 몸부림을 치는 여인을 앞에 두고,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 말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물끄러미 마당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별안간 손을 들어 마당구석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얼굴을 들어, 저기 기어가는 짐승을 보아라. 저게 무슨 짐승이냐?"

​여인이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마당 한쪽 구석에서 쥐 한마리가 살금살금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짐승은 쥐가 아니옵니까?"

"그렇다! 저 짐승은 네 말대로 쥐가 틀림없으렸다!"

​사또는 여인의 대답에 일단은 못을 박았다.

그리고 "쉬잇!" 하고 큰소리를 내어 쥐를 쫓았다.

그러자 쥐가 기겁하여 쪼르르 도망을쳐 쥐구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또가 죄수에게 다시 물었다.


"쥐가 지금 어디로 들어갔느냐?"

"제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구멍이라니? 제 구멍이란 어떤 구멍을 말하는 것이냐?"

"제 구멍은 쥐구멍 아니옵니까?"

"저것을 어째서 쥐구멍이라고 하느냐?"

"사또님도 참! 쥐가 들락날락하니까 쥐구멍이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여인은 무심코 말을 지껄였다.


그러자 사또가 즉시 추상같이 다그치는데

"옳지! 이제야 네가 바른 말을 하는구나.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쥐구멍이라 하듯이,

네 남편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것이' 비록 네 몸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네 것이 아니고 네 남편의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야 내 말 뜻을 알아듣겠느냐?"


여인이 자기 말에 걸려서 아무런 대꾸를 못하자,

사또는 지체 없이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저 계집은 어엿한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마음대로 피웠으니

파륜지죄(破倫之罪)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저 계집을 당장 끌어내어 다시는 오입질을 못하도록 곤장 삼십대를 쳐서 놓아 보내라."


사또가 서릿발 같은 판결을 내리자

김삿갓도 치밀어 오르던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듯,

통쾌감을 느끼며 사또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사또 어른! 이번 재판은 진실로 명 판결이셨습니다.

사또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갈수록 자자해질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처리해야 할 사건이 아직도 여러 건 남았으니 선생은 끝까지 지켜보아 주소서."


그러나 김삿갓은 지금이야말로 몰래 도망갈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또에게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 잠깐 뒷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김삿갓은 거짓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와,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와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며

달포 동안이나 자신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준 문천 군수 이호범 사또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고별인사를 한 구절 써 놓았다.


樂莫樂兮 新相知  (낙막낙혜 신상지)
즐거움은 새 사람을 알게 된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悲莫悲兮 新別離  (비막비혜 신별리)
슬픔은 친구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


김삿갓은 장장 한 달여 만에 다시 바랑을 지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잡으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문천 관아 밖으로 홀연히 나서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산천초목이 자기를 새삼스러이 반갑게 맞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에 들떠  발걸음은 총총, 사뿐사뿐 하였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