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 균형있는 게시판 사용을 위해 1일 1회로 게시물 건수를 제한합니다.
그것도 장대 같은 빗줄기 속에서,
내가 아는 친구의 성격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行態)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변변한 파라솔이나 비옷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잘 안다.
낚시용 텐트같은 것은 친구로선 생각 해 본적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농사철에 입으라고 농민들에게 지원(支援)된
칠천원 짜리 비옷에다
낡은 우산하나 아무렇게나 쓰고 엉덩이 겨우 걸칠 작은 낚시의자에
하루방처럼 앉아 그렇게 붕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니 때 같으면 내 갑작스런 귀향소식(歸鄕消息)에
득달같이 달려올 친구일 터이다.
그런데 조금 전 전화를 했을 때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는
뭔가 흥분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젯밤에 나 월척 했다네!
그것도 삼십오가 넘는 놈으로 두 마리씩이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될 것이다.
그 친구는 대물(大物) 꾼으로서의 소양(素養)은 원래부터 없어 보였다.
우선 그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웬만한 넓이의 저수지라면 그의 출현은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안녕하세요 뭐 좀 나옵니까?"로 시작되는 사람 좋은 그의 입담과 넉살은
오래지 않아 주위의 꾼 들을 사로잡아 버리고
어김없이 그의 낚시가방에서 비집고 나오는 소주병은
잠시후면 그 주위 사람들을 낚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길래 난 단언(斷言) 했었다.
그가 월척을 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 큼이나
어려울 것이라고...
그리고 그 예언(豫言)은 20년 동안 틀리지 않았다.
그의 습성을 아는 나는 낚시터에 도착하면 채집 망만 우선 담궈 놓고
친구가 자리잡고 낚시대 펴기를 기다린 후에
그 와 좀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정하는 것이 순서로 되어있었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자동차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수초 많은 소류지.
금년 봄 4짜에 가까운 올 첫 월척의 손맛을 내게 안겨 주었던 곳.
그 소류지 한켠 버드나무 아래 친구는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빛 바랜 우산 아래로 차마 다 가리지 못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반쯤은 맞으면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친구였다.
사업 잘되고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도 겸손하던 친구였다.
너나 나나 세상살이 힘들던 시절
어려운 사정에 못 이겨 친구며 친척 보증 몇 건 서준 것이 잘못된 후
아들 둘 대학 보내느라 뼈가 휘어 젓던 내 친구.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씩 마실 때면
객지에 나가 돈 좀 벌었다고 큰소리치는 부자 친구들보다
술값은 가난한 그의 주머니에서 나올 때가 더 많았다.
내가 몇 해전,
꽤 크게 벌렸던 무 농사 삼 년 내리 망치고 거의 탈진해 있을 때
얇은 주머니 털어 고급 낚시대 사다주며 낚시 가자고 달래던 친구,
그리고 낚시터에 가면
맡아놓고 우릴 위해 커피 끓이고 밥 짓던 친구였다.
그렇게 착한 친군데도 낚시만은 영 젬병 이었다.
낚시경력 이 십 년이 되도록 무월척(無越尺) 조사를 못 면한...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거기다 저수지가 쩡쩡 울릴 목소리까지 지녔으니
큰 고기 잡히는 낚시가 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를 쓰고 대어(大魚) 잡겠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난 붕어가 그렇게 힘이 세다 는 걸 어젯밤 처음 알았다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붕어이야기부터 꺼냈다.
늘 웃고 사람 좋은 친구라고 어찌 수심(愁心)까지 없겠는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그는 친구들 교복입고 상급학교 가는 것 보면서
농사일에 매달렸고 닥치는 일 안 가리고 해가며 성실함과 인내만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라 했던가 살만하다 싶을 때 사천만의 원수 IMF가 왔고
사람 좋은 그에게 씌워졌던 보증(保證)의 멍에는
그 가슴속에 한 덩어리의 피멍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날도 친구는 가슴을 쓸어 내리기 위해 저수지를 찾았으리라.
낚시대 두 대, 소주 한 병, 떡밥 한 봉지, 달랑 들고,
애초에 지렁이로 시작했던 그의 낚시는 콩알에 머물러
더 이상 발전할 줄 모른 체 이 십 년을 그대로 있었다.
이웃과 나누어 먹는 천렵차원(川獵次元)의 낚시에 길들여 있던 친구는 그날
수초 밭 작은 공간에서 소주한잔과 함께 시작한 잔챙이 낚시에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가보다.
캐미를 끼울 때까지 그의 살림망에는 꽤 많은 붕어가 담겨져 있었고...
비 내리기 전의 어두움과,
울적했던 심사와,
그날 따라 아무도 찾지 않았던 물가의 고요와,
낮부터 쉬 임 없이 떨어뜨렸던 밑 밥의 위력이
그날 친구 곁에 대어들을 불러모았을까?
아홉 시 반경에 붙은 첫 대물과의 겨루기에서 그는
붕어의 현란한 몸 동작에 등골에 진땀만 쏟고 핑하니 떨군 체
멍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한판 패를 경험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열시 경, 다시 찾아온 대물(大物),
낚시대 마디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지지 않겠다고
이빨 앙당 물고 버틴 그는 기어코 일생일대(一生一代)의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정 무렵에 같은 크기의 또 한 수...
어이없게도 콩알 물고 늘어진,
그 저수지에서는 처음 발생한
큰놈들의 불상사(不祥事) 이었다.(그곳은 참붕어나 새우에만 대물이 나왔었다)
친구는 그건 자기가 알고있는 물고기의 힘이 아니더라고 했다.
마치 쟁기 끌고 가는 황소 같더라고 도 했으며
천하장사(天下壯士) '이 만기'도 물 속에서 낚시바늘 물려 놓으면 그만 못하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 붕어를 보는 순간 첫사랑의 얼굴이 떠 오른 것은 뭔 일이다냐?
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장대비를 맞으며 낚시대를 담그고 있는 친구의 살림 망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 또 월척(越尺)붕어 잡으려고 이렇게 앉아 있는가?'
내 물음에 친구는 빙긋이 웃는다.
나는 안다. 친구의 마음을,
그는 결코 또 다른 한 마리의 월척을 더 잡기 위해
저렇게 비 맞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지난밤 잡은 두 마리의 월척이면 평생을 두고 만족할 것이다.
친구의 삶에는 지금껏 자신의 노력과 성실이외에
어떤 요행도 들어있지 않음을 내가 잘 알기 때문에...
대령에서 장성으로 진급한 군인들은 하릴없이 별 판 달린 차를 몰고
시내를 몇 바퀴 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친구의 지금 심정이 그런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하면서
쏟아지는 빗속에 친구를 두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저녁엔 친구와 술 한 잔 해야겠다.
그리고 노래방에도 갈 것이다.
'영일만 친구'도 부르고 '고래사냥'도 부르리라.
이 십 년만에 잡은 두 마리의 월척이 친구의 어려운 삶을 벗겨내고
새로운 행운과 희망을 가져다주라고 희망가도 부르리라.
친구가 좋아하는 '배호'의 노래를 이번에는 내가 멋들어지게 불러보리라!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헌데 제기랄 웬 비는 이렇게 온담,
나도 낚시 가고 싶은데!'
가버린 것이 모두 그리워지는 날
어유당(魚有堂) 올림
|
|
|
|
|
|
|
|
|
|
|
|
|
|
|
|
|
|
|
|
|
|
|
|
|
쫀득쫀득한 글솜씨 너무 즐겁습니다.
요즘은 어유당님 글 올라오나 안오나
그것만 목메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친구분과의 진한 우정도 부럽습니다.
항상 안출하시고 즐거운 출조하세요.
반갑습니다.어유당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