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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복실이의 간절한 눈동자는
아직까지 저의 뇌리에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대전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님 따라 대구로 왔습니다.
누님,형님은 학교 문제로 대전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요.
아직도 처음 살던 그 집은 기억에 잔재 합니다.
학교 담장 옆 골목길 찌그러져 가는 단칸방,
아주 쬐그만 부엌, 한사람 겨우 드나드는 출입 문…..
초등학교 입학 전,
큰 길가에 마당도 있는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님도 대구로 왔습니다.
어머님께서 시장에서 식료품 가게를 열게 되셔서
누님은 살림도 맡고 막내인 어린 저를 돌보기 위함이었죠.
또 하나 기억이 새롯이 나는 것은 "금성라디오"
당시에는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때라
라디오를 산 그 날은 세상 전부를 가진 듯이 기뻐 날뛰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고, 영원히 잊을수 없는 강아지, 잡견 복실이였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 언제나 제일 먼저 반겨주는, 집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대문 밖만 나서면 데리고 나가 달라고 낑낑 거렸고
나는 그 녀석을 데리고 신작로로 나가 같이 놀곤 하였죠.
아버님 낚시 갈 때면 집 앞 도랑에서 지렁이를 잡을 때도 옆에 있었고
친구들이 없을 땐 늘 그 녀석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복실이를 데리고 시장으로 오라는 어머님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순간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복실이를 판다고 하더군요.
멍~하였습니다.
목줄을 잡고 끌고 가는데,
평소에는 그리 잘 따르던 놈이 안간 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복실이는 본능적으로 직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질질 끌려오는 복실이의 눈을 바라 보았습니다.
글썽글썽한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흐를 것 같았습니다.
나를 향한 가련한 애원과 원망의 눈 빛이었습니다.
같이 엎어져 펑펑 울고 말았죠.
복실이 팔면 안된다고 무진 떼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어거지로 끌려 가는 복실이의 뒷 모습을 보며 엄청 울었습니다.
그것이 복실이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전 직장에 다닐 적에,
점심 떄 간혹 동료들끼리 보신탕을 먹으러 갑니다.
같이 가서는 혼자만 다른 음식을 시키죠.
"개 혀, 개 못 혀?"
아니, "개 안혀!"였습니다.
어느날 보신탕 집이 아닌 일반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었죠.
미리 주문한 맛있는 고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정도 눈치 못챌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러 딱 한 점 먹었습니다.
막 웃고 낄낄거리더군요.
그렇게 원하길래 속아 주었습니다.
장사할 때, 아이들이
"아빠 우리도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
"안 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키울만한 여유도 없었거니와
또 다른 이별이 두려웠던 까닭입니다.
4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 복실이의 눈동자는 잊을 수 없습니다.
혹여, 저를 만나시더라도
"개 혀" 권하지는 마십시오.
※ 다음 이야기는 추억의 조행기 '천리 길 낚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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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강아지와의 헤어짐이 무척이나 마음 아픔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ㅠㅠ
저도 같은경험을 했으니까요.. ㅠㅠ
저는 다큰 지금도 강아지클 키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원글로 달아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