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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에 대한 재평가

IP : 22afbc79e9ccc78 날짜 : 조회 : 9654 본문+댓글추천 : 0

송귀섭의 낚시칼럼 강태공에 대한 재평가 우리는 아주 쉽게 강태공을 말한다. 그리고 그 강태공에 대해서는 시골 촌부(村夫)라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의사소통을 한다. 어떤 의미(意味)로 통하는가? 넓은 의미로써는 낚시꾼 전체를 일컬어 말하고, 더 축소된 의미로는 하릴없이 빈둥대기만 하는 낚시꾼을 말한다. 그런데 그 말하는 사람의 속내는 넓은 의미이든 축소된 의미이든 전체가 다 강태공 즉 낚시꾼을 부정적(否定的)인 의미로 비아냥대는 말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낚시꾼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말하면서 강태공(姜太公)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첫째가 강태공이라는 인물(人物)에 대한 이해를 잘 못 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낚시문화(文化)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잘 못 이해(理解)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는 姜太公이라는 人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마치 강태공을 가사는 돌보지 않고 미끼도 없는 곧은낚시를 물속에 넣어놓고 시대차기만을 기다리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피동적이며, 소극적이고,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描寫)한다. 그러나 필자가 사료(史料)를 수집하여 공부한 바에 의하면 강태공은 최고의 학자(學者)이고, 전략가(戰略家)이며, 과학자(科學者)이고, 사업가(事業家)였으며, 당대에 가장 훌륭한 정치가(政治家)였다. 다음으로는 낚시文化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마치 물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은 실업자이거나 일과 가족을 팽개치고 하릴없이 물가에 앉아서 시간만 축내는 사람으로 치부하여 강태공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나 본 낚시인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일하는 중에 휴식을 위해서 물가에 나와 취미생활(趣味生活)로써의 낚시를 즐기는 것이었고, 혹 퇴직자라도 낚시를 통해서 재충전(再充塡)을 하여 생활에 활력(活力)을 불어넣고자 물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었다. 간혹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고 음주소란을 피우다가 쓰레기나 버리고 가는 사람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낚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낚시를 욕되게 하는 못된 행락객(行樂客)이라고 해야 맞다. 여기에서 필자는 우선적으로 강태공에 대한 재평가(再評價)를 하여 그 긍정적인 평가사항을 널리 알림으로써 낚시계 전반에 대한 이해(理解)를 증진(增進)시키고, 낚시인의품격( 品格)을 고양(高揚)시키고자 이 글을 쓴다. 1. 姜太公은 누구인가? 강태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3100여 년 전 사람으로 <姜太公>,<太公>, <太公望 呂尙>, <太公望>, <呂尙>, <姜尙>등으로 불리며, 字는 <子牙>이고 號는 <飛熊>이며, 史記의 齊太公世家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으로 그 뿌리가 우리민족과 다르지 않다. 본래 姓은 <姜>이며, 이름은 <尙>이였으나 강족(姜族)으로 전통 동이족(傳統 東夷族) 출신이었던 선조가 <呂>나라에 봉(封)해짐으로써 봉지(封地)를 따라 氏를 삼아 <呂尙>이라 하였으며, 太公望이라는 명칭은 선왕 혹은 윗분(太公)이 바라고 기다리던(望) 사람이라는 뜻으로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姜太公이 동이족(東夷族) 출신 명문가의 人物이며, 후일에는 王으로부터도 크게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낚시꾼을 강태공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우리에게 극존칭(極尊稱)을 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강태공으로 불리는 우리 낚시인 모두가 그 姜太公다운 品格을 갖추고 品位를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姜太公은 어떤 일을 한 사람인가? 姜太公은 중국 주(周)나라의 始祖인 文王과 武王 代에 걸쳐서 태사(太師)를 지낸 인물로, 周나라 文王(당시는 은(殷)나라 주황제(紂皇帝)의 제후국(諸侯國) 왕으로 서백 창(西伯 昌)으로 호칭)을 보좌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강군을 육성하여 제후국간에 세력을 확장 하였으며, 武王 대에 이르러서는 부패한 은(殷나라) 주왕조(紂王朝)를 멸망시키고(무왕 13년) 주(周)나라를 세운 공신이다. 이후 周나라의 太師로서 殷나라 시대에 도탄에 빠졌던 백성을 잘살게 하고, 군사와 무역을 잘하였으며, 殷나라를 멸(滅)하고 周나라를 세운 공으로 제(齊)나라의 시조(始祖) 王이 되어 태평성대의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 특히 齊나라(지금의 산동반도) 왕으로 부임하여 통치를 할 때는 天, 地, 人 3신 숭배의 제천행사(帝天行事)를 하고, 1년을 72候(1후=5일)로 구분하여 자연현상 변화에 따라서 때에 맞춰 영농(營農)을 하게 하는 등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하였으며, 나라 소작 배분을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9:1로(백성몫9, 나라세1) 하여 백성의 몫을 넘치게 해주는 등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충실했다. 또한 나라세를 줄여 농사를 장려하면서 농기구를 비롯한 기계를 연구하여 보급하는 등 공업을 발전시키고, 풍부한 농, 공 생산품을 인접국가와 무역을 하도록 하는 등 국제무역에도 문을 열었다. 그러는 중에도 군사전략(軍事戰略)을 연구하여 그 유명한 육도삼략의 <육도(六韜)>를 쓰고, 음부경(陰符經)과 태공병법(太公兵法), 태공금궤(太公金?) 등의 저서를 남겨 후일에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썼던 손무(孫武)가 수차례 탐독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에서 고급과정 군사전략(高級科程 軍事戰略)서로 필독하는 저서이다.(필자도 군 시절 陸軍大學 정규과정에서 공부를 했던 과목이다.) 3. 姜太公의 삶은 어떠했는가? 姜太公의 一生에 관해서는 궁팔십(窮八十)+달팔십(達八十) 하여 160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설이 있고, 한편으로는 BC1211년에 출생하여 BC1072년에 사망했다고 하여 139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설이 있다. 앞에서 窮八十이라고 한 것은 문왕을 만나기까지 80년 동안은 초야에서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達八十이라고 하는 것은 80세 이후 出仕하여 80년 동안 세상에 뜻을 펼친 기간이라 한 것으로 합이 160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60세이든 139세이든 그 나름대로 설명은 하고 있으나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순자(荀子)와 한시외전(漢詩外傳)을 근거로 周 文王을 만났을 때가 70세였고, 武王 代에서 30년을 더 살아서 100세까지 살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姜太公이 이렇게 신격화(神聖)가 된 것은 명조(明朝)에 허중림(許仲琳)이 썼다고 알려진 봉신연의(封神演義) 때문인데, 여기에서 강태공은 신들과 동격에서 통하는 살아있는 神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봉신연의) 아무튼 강태공이 보통 사람보다 장수하였던 것은 분명한 듯 하고, 그렇다면 그의 생애(生涯)는 어떠했는가? 4. 姜太公의 出仕이전 생활 재평가 姜太公은 출사(出仕)이전에는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그것은 본시 벼슬을 하는 名文家태생이였으나 부친이 곧은 성품에 의해서 관직(官職)을 삭탈(削奪) 당하고 가세가 기울어서 스스로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태공은 殷나라 수도인 조가(朝歌)(지금의 하북성 淇縣)에서 조리대를 가지고 대조리를 엮어 시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소금과 밀가루 장사도 했으며, 국수장사, 음식점, 소나 돼지를 잡아 파는 白丁 등을 하였고, 이 모든 것이 잘 안되자 배운 글로 사주풀이를 하여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공사감독을 하게 되었으나 그 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공사의 부당성을 간(諫)하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로는 殷나라 마지막왕인 紂王(주왕)의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황음무도(荒淫無道)에 실망하여 초야로 들어가서 학문에만 심취하고, 오직 낚시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가면서 뜻을 펼칠 시대를 기다렸다. 이러한 강태공의 출사(出仕)이전 다양한 경험은 후에 周나라와 齊나라를 부강하게 하는데 크게 작용한다. 혹자는 이 시절의 강태공 생활에 대해서 마치 무위도식(無爲徒食) 하면서 하릴없이 물가에 나가 곧은 낚시 물에 넣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생각은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가장 천직(賤職)인 백정(白丁)노릇까지도 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수없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끈기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찾아서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다가 殷나라의 紂王이 실정(失政)을 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하고 초야에 묻혀서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군사전략(軍事戰略)을 비롯하여 정치(政治), 인륜(人倫), 치세(治世)에 대한 공부를 했던 것이다. 만약에 이때 姜太公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文王을 만나 하루아침에 太師가 되어 나랏일을 보면서 그렇게 출중하게 정사(政事)와 군사전략(軍事戰略) 등의 임무수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후에 殷나라를 멸(滅)하고 周나라를 굳건히 세운 후 齊나라 왕이 되어 추후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476년)와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221년)에 큰 힘을 가질 나라를 어떻게 건국(建國)하고 치국(治國)했겠는가? 필자는 姜太公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실존인물(實存人物)임을 고려할 때, 그는 일생의 반은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쌓았고, 일생의 반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하는데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가 웨이수이(渭水)에 나가서 낚시를 즐긴 것은 우리가 여가에 낚시를 나가는 것과 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여가 취미 생활이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5. 婦人이 家出한 사건은? 姜太公의 부인은 마(馬)씨였다. 일부 기록에는 강태공이 72세 때 부인과 결혼 했다고 한 것이 있으나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순자(荀子)나 한시외전(漢詩外傳)에 의하면 姜太公이 文王과 만날 때가 70세였다고 하니 72세에 결혼을 했다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강태공이 문왕과 만날 때는 이미 馬씨부인이 가출을 한 뒤였기 때문이다. 어떻든 馬씨부인은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는 姜太公을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살았다. 소금장수로부터 백정까지도 하면서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살던 강태공이 모처럼 얻은 공직에서 쫓겨난 이후 殷나라가 滅하고 새로운 時代가 올 것에 대비하여 오직 학문에만 열중할 때 馬씨부인은 온갖 일을 다 하여 살림을 꾸리고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에 의해서 집을 나가고 마는데, 그 사건이란 馬씨부인이 밭일을 나가면서 정좌하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姜太公에게 혹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갱피(곡물 피의 일종)를 거두라고 부탁하였는바, 그날 큰비가 와서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마당에 널어놓은 갱피는 다 떠내려가고 없고, 강태공은 그때까지도 비가 온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책만 몰두하여 읽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馬씨부인이 그간 쌓인 고생과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여 그만 집을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마치 姜太公이 무능하고 낚시만 즐겨하여 馬씨부인이 화가 나서 가출한 것으로 회자되기도 하나, 당시 강태공은 너무 학문(學問)에 심취한 나머지 가사에 소홀했을 뿐이고, 馬씨부인도 그러한 강태공을 잘 보필하였으나 끝내 너무 궁핍한 생활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작은 사건을 계기로 집을 나가고 만 것이었다.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 제후가 되어 행차 중에 馬씨부인이 나타나서 용서를 빌고 함께 갈 것을 요청하였는바 姜太公이 물을 떠오게 하여 땅에 쏟게 하고는 ‘땅에 쏟은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다.’고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제나라 왕이 된 강태공의 행차) <覆水不返盆 = 覆水難收 :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복수불반분 = 복수난수 이렇게 姜太公이 齊나라 제후(諸侯)가 되어 행차할 때 馬씨부인이 따라가겠다고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으로 보아서 마씨부인의 심중에 강태공은 정이 남아있는 남편이었고, 강태공 또한 비록 마씨부인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후일에 馬씨부인을 <서낭신>으로 봉하는 등 옛정을 보인 것으로 보아 만약 馬씨부인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세월을 보냈더라면 차후에 齊나라의 왕후(王后)가 되었을 것이다. 6. 姜太公의 곧은낚시란? 그렇다면 곧은낚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물고기를 낚을 수도 없는 곧은낚시를 물에 담그고 세월을 보내는 것이 한심한 일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무식(無識)의 소치(所致)이다. 당시에는 실제로 물고기를 낚는 바늘 종류 중에 곧은바늘(直針)이 흔히 사용되었고, 그 바늘에 미끼를 달아서 물고기를 낚은 기록(記錄)이 있고, 현존하는 실물(實物)이 있다. 이러한 곧은바늘은 비단 中國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용되었으며, 그 유물이 출토(出土)되어 현존(現存)한다. (고대의 낚싯바늘 중 곧은 바늘) (여서도 패총에서 나온 곧은바늘, 반조각) 그리고 지금도 中國에서는 자급하여 만든 곧은바늘을 이용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곧은바늘을 마치 전혀 효용가치가 없는 쭉 펴진 바늘처럼 묘사(描寫)하여 강태공이 하릴없이 물가에 앉아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한 것처럼 잘못 인식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임금이 찾아주는 시대차기만을 기다린 피동적인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처럼 그릇되게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姜太公은 낚시를 해서 실제 물고기를 낚았고, 그러면서 많은 인격수양(人格修養)과 공부를 했던 것이다. 姜太公의 일화 중에서 물고기를 낚은 모습을 찾아보면 설원(說苑)이라는 고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강태공이 70세 일 때 위수(渭水=웨이수이)에서 낚시를 하는데, 사흘 밤낮동안 입질이 없어서 은근히 화가 나 있었다. 이때 인근에 사는 농부가 와서 “가는 낚싯줄에 향기로운 미끼를 달아서 쓰되, 고기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해 보시오.”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이에 姜太公이 그 말을 따라서 하니 처음에는 붕어가 올라오고, 다음에는 잉어가 올라왔다. 여기에서 보듯이 당시 姜太公은 미끼도 없는 곧은 바늘을 물에 담가놓고 시대차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실제(實際)로 물고기를 낚으면서 낚시를 취미(趣味)삼아 자기 수양(修養)을 하고, 學問 탐구 중에 오는 답답함을 해소했던 것이다. 7. 姜太公과 文王의 만남 그리고 天下統一 姜太公을 만날 당시 文王은 은(殷)나라 서쪽 제후국(諸侯國)의 우두머리 격인 서백(西伯)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문왕은 殷나라의 서쪽 제후국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워가는 중에 큰 인재(人材)가 절실히 필요 하였는데, 하루는 사냥을 나가기 위해서 점을 쳐보니 ‘용이나 이무기나 호랑이나 큰곰이 아닌 人材를 얻을 것이다.’하는 점괘(占卦)가 나왔다. 그날은 위수(渭水)의 상류지역인 반계(磻溪)로 사냥을 나갔는데, 우연히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물가에 앉아서 낚시를 하는 노조사(老釣士)를 보고 문답(問答)을 나누었다. 서백 창 : 무엇을 낚고 있소이까? 강 상 : 세월을 낚고 있소이다. 서백 창 : 여기는 내 땅인데 허락은 받았소이까? 강 상 : 天下非一人之天下 천하비일인지천하 乃天下人之天下也 내천하인지천하야 同天下之利者則得天下 동천하지이자즉득천하 (천하는 한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천하이니 천하의 이익을 함께 하는 자만이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文王은 머리를 스치는 점괘, 즉 큰 人物을 만날 것이라는 점괘를 떠 올리고, 人材를 얻는 법과 천하 경륜(經綸)에 대한 문답(問答)을 오래 한 후 강태공의 인물(人物)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수레에 태우고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조회가 끝난 후에는 신하들과 함께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수레를 타고 출사하는 강태공 상) 이후 강태공은 太師(임금의 스승이면서 임금을 대리하여 국사를 살핌)로써 그동안 공부해 온 천문지리(天文地理), 병법(兵法), 인륜(人倫), 치세(治世) 등의 해박한 지식을 영농(營農)과 군사전략(軍事戰略) 및 국가경영(國家經營)에 적용하였고, 강태공의 보좌를 받은 文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天下의 2/3를 얻었으나 끝내 천하통일(天下統一)을 보지 못하고 뒷일을 강태공에게 부탁하고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어서 즉위한 武王은 父 文王의 뜻을 계승하여 姜太公을 太師로 모시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결국 武王13년에 부패한 은(殷)나라를 멸(滅)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강태공을 제후국 제(齊)나라의 시조 후(侯=王)로 봉(封)하였다. 이로써 강태공은 마침내 齊나라(지금의 산동반도)의 王이 된 것이다. (산동성의 강태공 기념관과 사당) 이후 齊나라는 강국을 이루어 세월이 흘러 周왕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군웅(群雄)이 할거하던 294년 동안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200여개 제후국(諸侯國) 중에서 세력이 강한 5國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어서 254년 동안의 전국시대(全國時代)를 거치면서는 진(秦)나라가 전국통일(全國統一, BC221년)을 이룰 때 까지 연(燕), 진(秦), 초(楚), 한(韓), 위(魏), 조(趙)와 더불어서 주요7國 중 한 나라였다. 8. 최초로 姜太公을 깎아 내린 것은 孔子(공자)였다. 공자(孔子)는 강태공보다 650여년이나 늦게 周 文王의 셋째 아들인 주공 단(周公 旦)이 세운 노(魯)나라에 태어나서 군웅(群雄)이 할거 하고 국운(國運)이 불안정한 상황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73세까지 살았던 학자였다. 孔子의 정치사상은 政治의 道를 기본으로 하는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 정치였으며, 이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 정치사상을 가진 姜太公과는 반대 입장이었고, 성인군자형(聖人君子形)의 이상형정치가인 주공 단(周公 旦)과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孔子는 평소에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周公 旦을 꼽았었다. 그런데 孔子가 가장 존경한다는 周公 旦과 강태공은 뿌리 깊은 악연이 있었으니, 周公 旦이 주 왕위(周 王位)를 계승하고자 했을 때 姜太公이 극력 반대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姜太公은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학문을 하고, 성실하지 않으면서 덕을 베푸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周公 旦을 반대하니 周公 旦이 그만 물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周公 旦은 주 왕실(周 王室)을 떠나서 제후국인 노(魯)나라를 건국(建國)하여 王이 되었는데, 항상 강태공의 제(齊)나라가 더 부강하고 융성했다. 이에 周公 旦을 존경하는 孔子로써는 주공 단과 대립하는 人物로써 강태공이 미웠고, 정치사상이 다른데, 거기에다가 나라까지 齊나라가 대를 이어 더 우위에 있으니 항상 이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姜太公에 대해서는 철저히 역사무대에서 왜소화(矮小化) 하고, 축소(縮小)하고, 무시(無視)했다. 천하의 聖人君子로 알려진 공자도 강태공에게 만은 시기와 질투를 표출했던 모양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姜太公이 그만큼 큰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추후 동양사상(東洋思想)과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큰 스승이 된 孔子가 강태공을 철저히 비하한 것은 결국 훗날 姜太公이 하릴없는 게으름뱅이 혹은 한심한 낚시꾼으로 치부되는데 주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자가 낚시의 도를 가르치면서 조이불망(釣以不網)이라고 하여 고기잡는 방법 중 군자가 행할 행동으로 낚시를 높이 평가한 것은 당시 공자도 낚시에 대한 식견이 있었거나 어느 수준의 낚시꾼이 아니었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도 든다. 9. 姜太公에 대한 再評價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강태공은 뛰어난 學者요, 思想家요, 軍事戰略가요, 政治家였다. 그리고 姜太公이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한 것은 학문에 몰두 하는 중에 물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낚으면서 활력을 재충전하는 취미생활이었다. 이러한 姜太公에 대해서 오늘 날 일부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온당치가 못하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낚시를 좋아하는 강태공이라고 해 준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표현인가? 현재도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는 강태공 사당과 기념관이 있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 시대의 영웅인 강태공을 접하고 간다. (강태공 사당 앞에서의 제례) 원컨대 姜太公의 전략서인 문(文), 무(武), 호(虎), 용(龍), 표(豹), 견(犬)의 육도(六韜)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강태공을 평가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강태공이 낚시한 장소를 기념하는 위수의 조어대) 10. 姜太公의 精神과 思想 -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知慧) - 조급하지 않고 자신을 이겨내는 극기(克己) - 차후를 위해 준비하는 면학(勉學) -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民本主義) 11. 姜太公 語錄 - 군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기뻐하고, 소인은 눈앞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한다. - 부지런한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이다. - 남을 저울질할 때 내가 먼저 저울질이 됨을 조심하라. -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항아리 밑을 비추지 못하고, 칼날이 날카로워도 죄 없는 사람을 베지 못하며, 뜻밖의 재앙도 조심하는 집안에는 오지 못한다. - 남의 참외밭 가장자리에서는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마라. - 관리로써 공평하고 결백하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참된 관리가 아니다. -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여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라. - 미끼로는 고기를 낚을 수 있고, 녹으로는 인재를 부를 수 있다. - 천하는 왕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만백성의 것이다. -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 백정 노릇을 옳게 하지 못하면 나라를 잡는다. (下屠屠國) 하도도국 출처 :평산 송귀섭 원문보기 글쓴이 : 평산

3등! IP : 8d8b8ef682e7f0b
길목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강태공에 좀더 자세히 알게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저도 낚시잡지인지 다른 책에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곧은 바늘에 대한 글은 본적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제법 공부도 하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친구와
곧은 바늘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더이상 설전을 벌이기 싫어 제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실제 곧은 바늘로 낚시를 할수 있답니다
목줄 묶는 부위를 바늘 끝이라면 답이 없지만
바늘 중간이라면 답이 나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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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4e3a32a8aab3af2
옛글에 보면,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 중에 "된 사람"이 되라 했거늘....

그 시대에는 여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별 잘못한 일없는 조강치처가 너무나 살림에 뒷전인 남편때문에 살기 위해

가출한 마누라를 강태공 나중에 잘 되었다면, 그리고 된 인물이었다면, 너그러히 용서(?)를 하면서 다시 받아 들였어야 하는데...

엎질러진 물이라고 하면서 박대하는 것은 .... "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든 사람"이거나, "난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래서 아마 부정적인 의미의 낚시꾼 호칭이 "강태공"이 된 것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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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dc881f3074c7c10
강태공에 대해 조금 알고 있지만 ..
노구의 아내가 집을 나간 것과 . 벼슬후에 아내를 용서 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책을 보면, 학문에 심취하고 집안 경제사정에는 거의 나몰라라 하는 식 이었기 때문에 , 일흔이 넘을때 까지 함께 한것은 아내로써 할만큼 하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요즘 같으면 이혼 사유가 되고도 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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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56ad05963056a52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여태 잘 못 알고 있던걸 바로 잡게 되는것 같네요
담부터 친구가 강태공이라고 부르면 고맙다고 해야 할거 같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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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d83731c45efa44e
좋은글 좋은 정보 늘 감사 합니다!

늘 안출하시고 좋은 그림 많이 구경하시길 기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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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b7fe6329b449682
강태공께서는 어떤 낚시대를 쓰셧을까요? ㅎㅎ
대나무를 그냥 직접 잘라다가 줄만 달고 고기를 잡지 못하는 바늘을 다셨을까요?
아니면 선물로 받거나 어떻게 장만한 장인?이 만든 낚시대를 쓰셨을까요?
길이는 과연 어느정도의 낚시대를 들고 하셨을까요?
좀 옆길로 마니 샌 궁금증이지만 항상 궁금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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