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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비(꽁트) 3부

IP : 25297cccde4f02f 날짜 : 조회 : 4959 본문+댓글추천 : 0

3부
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나는 그 가게 앞에 발을 멈추었다. 한동안 가게 안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늦은 방문객을 안경을 벗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나의 질문을 받은 여인은 나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다. 나를 알아본다는 눈치다.
"oo동에서 살았지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의 집 부근에서 자취를 하던..., 당신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쫓겨난 신문배달 하던 고학생이 바로 납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가벼운 미소를 감추고 있었다.
"가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요." 하나도 커진 것이 없다는 나의 핀잔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얼마간의 적막이 흐른 후 적막을 깨려는 듯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잠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날, 비 오던 날 당신에게 당한 수모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가볍게 떨리며 원망 섞인 내 말을 듣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리쉬고 있었다.

"나도 그 때 내 잘못을 집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그 때는 내가 너무 놀랐고 그 당시에 남녀가 우산을 같이 쓰고 다닐 수 있는 여견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그렇지요, 사람을 송충이 보듯 밀치고 도망을 갔으니 부잣집 딸이면 얼마나 잘사나 두고 보자고 했었습니다."
"나도 사실은 어린 나이에 열심히 일하며 공부하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고, 자가용을 타고 가다 만날 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답니다. 아버지도 늘 당신을 칭찬하곤 하셨지요."
"아니, 댁의 아버님이 저를 칭찬했다고요?"
"그랬지요. 스스로 어려운 시절에 자수성가 하셨던 아버지라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언젠가는 성공할 사람이라며, 남편은 당신 같은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도 당신을 흠모하게 되었고, 당신이 이삿짐을 들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로 인하여 떠난다는 것을 알았고 가슴아파했습니다. 친구들은 통해서 당신이 S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들었지요. 내심 반갑더군요. 친구들은 만나면 당신의 소식을 물어보곤 했답니다. 아버지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고 한때나마 내가 그리워 했던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좋았습니다."
차 한잔을 따라주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혼기가 다가오자 아버지는 당신에게 중매인을 보내려고 했으나, 제가 한사코 거절을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밀치고 우산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은 당황해서 그랬던 것이고, 생각을 해보니 남녀가 한 우산을 쓰고 간다는 것이 당시의 정서로는 불가했던 것도 당연했다. 나 혼자 생각으로 그녀를 원망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칭찬을 하고 그녀는 나를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내가 지나치게 오버를 했던 것 같군요. 사실 나는 당신에 대한 오기와 복수심 같은 것으로 더욱 열심히 살았고,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타나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나를 사랑했건 증오를 했건, 나로 인하여 당신이 성공을 했다니 축하를 할 만 하군요. 모두가 지난 추억이지요. 본의 아니게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면 용서하세요. 딸애한테도 간혹 당신의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그녀는 가볍게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 하찮은 일을 가지고 30년이란 긴 세월을 한 사람을 증오하면서 살아온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되었고 원망스러웠다.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옹졸했던지 부끄러운 마음을 금 할 수 없었다.
"내가 오해를 했으니 추억 속으로 묻어 버립시다."

그녀가 따라주는 차 한잔을 다 마셨을 때쯤 여학생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 집에 가야죠?" 그 여학생을 보는 순간, 젊은 날의 그녀를 보는 듯 했다.
"전에 내가 가끔 말하던 학창시절 이웃에 살았던 그 아저씨야, 인사를 드려."
학생은 고개를 끄덕 절을 하고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따님이 젊은 날의 부인을 그대로 닮았군요. 헌데 부군은 무얼 하시나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당황하는 눈빛을 보였다. 나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이태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딸 하나를 두고..."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혹 필요할지 모르니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들도 가야지요." 그녀는 명함을 받아서 보지도 않고 마루 위에 놓았다.

가게문을 닫고 거리로 나왔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 앞에 세워진 작은 승용차를 타면서 가벼운 미소와 함께 목례를 했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자동차를 찹찹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마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