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메일일 끊긴지 이 주 만에 나는 z를 만났다.
이주라는 시간의 간극이 나에게 이성을 찾게 해준 탓인지 z를 만나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들으며 z는 내가 처음 그의 글을 읽을 때처럼 신열에 들떠,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왜 헤어져야 하는지, 왜 내가 자신을 떠나야 하는지.
하지만 내 눈빛과 목소리, 표정은 자신이 알던 내가 아니라고 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가 물었을 때, 차마 그 사람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z의 분노를 보았다. 머뭇거리는 나를 잡고 흔들며 널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묻던 그의 눈에서 번쩍이던 분노……. 나는 “글”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사 글어 드는 걸 보며 나는 차분히 그에게 다시 설명했다.
그게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위로였다.
“오직 글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이젠 세상 그 무엇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
그를 혼자 두고 자리를 벗어났을 때 뒤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릴게.”
갑자기 눈물이 맺혀 왔다. 이젠 절대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만 날 잊어달라는 말이 솟구쳐 올랐지만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때 그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변화되어버린 내게 그는, 그의 아픔은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질 못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그에게서 온 문자 한통에 심장은 요동치며 z는 까마득히 지워져 있었다.
“정말 불이 밝혀지는 아파트가 체스판 같네요.” 그가 내 곁에 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내 일기처럼 내가 앉던 그네에 앉아 내가 바라보던 아파트의 체스판 같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떠났을까? 하는 조바심에 집 앞 공원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한없이 초조했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 낮과 밤이 교차하는 미명아래 그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소름이 오싹 돋아와 한참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창밖에 그때와 같은 어슴푸레한 미명의 시간의 흐르는 걸 보며 그와 주고받던 메일함에 열었을 때,
이년 만에 그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때와 같은 공포와 희열이 복합된 소름에 온몸이 굳어졌다.
그를 증오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던 그 메일함은 그동안 시간이 정지해 있었다.
그도 내일 인터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두려웠을까?
나로 인해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붕괴되어 버리는 것이 두려웠을까?
나를 막고 싶을 것이다. 제발 자신을 파멸시키지 말아 달라고 내게 애원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어떤 변명과 괴변과 협박들이 들어 있을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메일을 열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네의 한쪽 쇠사슬에 머리를 기댄 체 꿈꾸듯 앉아 있었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가 한번 힐끔 쳐다보았을 뿐,
다시 그 자세로 돌아갔다. 곁의 빈 그네에 앉아 그가 바라보는 빛의 여운이 사라져 가는 푸르스름한 하늘과
하나둘 불이 밝혀지는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내가 좋아하던 버터 빵처럼 부드럽게 어둠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걷고 싶었어요.” 어둠이 짖어지고 변화를 마무리한 편안한 시간이 되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쇠사슬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와 정장바지, 그리고 정장구두가 그의 덥수룩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이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40대중반의 아저씨란 이미지는 적당히 벗겨진 머리와
굵어진 허리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의 훤칠한 키와 살집 없는 몸매는 삼십대 초반의 직장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작정 걸었어요. 내가 속한 모든 것들로부터 그렇게 떠나고 싶었어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언제 감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머리와 덥수룩해진 수염, 회색 와이셔츠로 착각할 만큼 때에 전 와이셔츠와
구겨진 바지가 그가 먼 길을 걸어왔다는 걸 알게 해줬다.
보름동안 그는 걸어서 그가 살던 곳에서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마만큼 큰 것인지는 가슴 아리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먼 길을 앞장서 갔다.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오지 못할 멀고 낯선 길이었지만 조금의 미련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다.
욕탕에 몸을 담근 그는 깨어 있으면서 잠든 척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진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을까?
나는 그의 턱에 거품을 묻혀 면도를 했다. 면도날 끝으로 과거가 잘려나가는 섬세한 느낌들이 전달되었다.
면도를 끝내고 바라본 그의 얼굴은 헬쓱 했지만, 그가 보내온 원고 속에서 떠올리던 b와 닮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온몸을 깨끗이 씻겼다. 낯선 그였지만 그의 몸을 씻기는 행위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내 몸과 영혼에 깃든 과거의 나를 정화시키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를 남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의 몸을 씻길 때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온몸을 맞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타구니 쪽을 닦아내며 처음으로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가 번쩍 눈을 뜨더니
거침없이 탕에서 일어서 수건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욕실에 남아, 나는 한 꺼풀씩 옷을 벗었다.
내 스스로 그를 위해 나를 가리고 있던 껍질들을 모두 벗어냈다.
신전에 바쳐지는 제물처럼 내 몸을 성스럽게 닦아내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흰색 시트에 깊이 묻힌 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불속을 파고들어 그의 곁에 가만히 누웠다.
잠든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숨소리, 체취까지도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그의 몸 위로 한쪽다리와 한쪽 팔을 올려놓았다. 맨살이 마주치는 부드러운 촉감들이 감미로웠다.
그의 가지런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깊이 잠든 그의 온몸을 입술로 어루만졌다.
그렇게나마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내 입안에 가득 베어 물었을 때, 그가 몸을 움찔하며 깨어났다.
격정적인 환희에 무너진 온몸의 근육들이 축 쳐져 있을 때 그가 내게 물었다. “왜 글을 쓰지 않아요?”
“나는 글쓰기엔 너무 행복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내 대답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20년 동안 글에서 도망 다녔다는 이유가 뭐예요?”
“한 줄의 글이라도 읽거나 쓰게 되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현실적인 삶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그는 말끝을 흐렸다.
대답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보름동안 걸어오신 거예요. 그럼 직장은.”
“다시 현실속의 삶으론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끈적한 그의 눈물이 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힘들어요.”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머리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아침에 깨었을 때, 그는 이미 떠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떠난 것인지 어젯밤 내가 잠들었을 때,
또 그렇게 먼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인지 궁금했다. 내 곁에서 깊은 잠을 자고 아침에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라도 그의 영혼이 편하게 쉬었기를 바랐다.
그날 밤, 그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원고에 b는 먼 길을 걸어와 영혼의 안식을 찾았다고 쓰여 있었다.
내 품안에서 짓이겨진 영혼의 구원을 발견했지만, 내 안에 감춰 놓은 상처를 발견하고 아팟 노라고 쓰고 있었다.
그의 원고를 통해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 현실화 되었다.
그의 작품 속 b는 '그'였고, 그가 멀리서 사랑하고 꿈꾸던 순결한 처녀는 나였다.
저주받고 어둠속을 헤매는 주인공 b와 그 어둠속에서 발견한 삶의 희망인 여인은 바로 그와 나였다.
그의 원고는 다른 때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았고, 그토록 섬세하던 심리묘사와 유려한 플롯 전개가 사라졌다.
문장 하나하나가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빈 모래사장위에 툭툭 던져진 것처럼 생뚱맞았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 그의 원고를 읽었지만
너무 심하게 변해버린 그의 글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일인칭으로 진행되던 글이 삼인칭으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젠 문장과 문장사이 빈 공간들을 내가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이젠 그의 말은 끝이 났고 내가 내 영혼의 울림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그의 문장과 문장사이 빈자리를 내가 전해야할 이야기들을 적어 나갔다. 내
마음속에 간직된 비밀들을 모두 그곳에 채워 넣었다.
모든 것은 진실했고 절실했다. 꾸밈이나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 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내 필체는 조악하고 세련되지 못했다.
그가 전반부를 이끌어 오던 그 깊고 아름답던 문체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았고, 내가 해야 될 일을 발견했지만 그것은 내 의지일 뿐 내가 가진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을 지워버릴까 망설였지만 결국 그에게 내가 써놓은 원고를 보냈다.
그에게 내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려줘야 될 것 같았다.
다음날 그에게서 두 개의 파일이 도착했다. 첫 번째 파일을 여는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게 너무나 실망했을 그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파일을 열었을 때 내가 보낸 원고의 수정본이 들어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던 것들의 의미는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체, 문장들이 눈부시게 변해있었다.
내가 썼던 내용이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간절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머지 파일을 열었을 때 더 짧고 간략한 원고가 들어있었다. 내게 맡겨진 공간이 너무나 커져버린 원고였다.
하지만 부담스럽기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내 뒤엔 그가 있었다.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 분명히 말해줄 그가 있었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몇몇 부분은 그가 바꿔 놓은 내 원고의 필체를 조금씩 응용해보는 여유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이렇게 그와의 글쓰기가 지속될수록 내 자신이 성장해 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소설이 끝나갈 무렵 내가 보낸 원고에 수정된 곳을 찾기 힘들었다.
두 권 분량의 소설이 완성되었을 때, 그날처럼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마지막 ‘끝’이라는 글자를 쳐 넣고 복받쳐 오르는 기쁨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변하기 시작했던 건 언제였을까? 첫 만남 이후 그는 매주 나를 찾아왔다.
그와의 만남은 나에게 행복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행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만날 때마다 그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을 요구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꿈도 꾸지 변태적 성행위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성적 취향이 독특한 거야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그가 원하는 것들에 들어 주었다.
그의 가학적인 성적취향은 도를 더해갔다. 그와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
좌절과 수치심에 몸을 떨며 내 자신이 얼마나 더 망가질 수 있을지 자문해 보는 길이었다.
그는 어떤 것이 여인의 수치심을 유발시키는지 철저히 파악된 사람처럼 내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 나는 겁에 질리곤 했다. 오늘은 또 어떤 것들을 가지고 왔을까?
얼마나 나를 아프게 하고 내게 수치심을 안겨줄까?
하지만 그 고통마저도 그를 위해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문단에 보기드믄 소란이 일어났다.
마치 영웅이 탄생하길 긴 세월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내는데 모두가 주저하지 않았다.
언제나 각을 세우던 평론가들조차 모두가 입을 모아 그의 소설을 칭송했다.
우리소설은 영어와 중국어를 비롯해 7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소설, 갑자기 낯선 단어에 코끝이 찡해진다.
그것이 우리소설이었던가? 책이 출간되고 작가의 변에 내가 거론되지 않았을 때, 약간의 당혹감이 일었던 건 사실이다.
아무리 내가 많은 노력을 했다하더라도 그건 그의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숫한 인터뷰와 기사들 속에서 조차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지워져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실감이 느껴졌던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을 때도, 그가 소문이 좋지 못한 유명 여류작가와의 열애설이 들려왔을 때도,
그녀의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너무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성품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도 상실감을 느꼈던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는 내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내게 쓰라린 흔적들과 사랑의 아픔을 남겨두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안에 글을 남겨놓았다. 만약 내게 글이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과 문을 닫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막고,
내 안에 이는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홀린 듯이 글을 썼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웃고 울며 새로운 세상 속에 머물렀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행권 분량의 소설의 초고에 ‘끝’이라는 단어를 쳐 넣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그의 소설을 끝냈을 땐 희열의 눈물이었다면 이번엔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어쩌면 그 글은 그에게 보내는 내 편지였을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컸다고, 아직도 당신에겐 내가 필요하다고......,
내게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애원일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완성된 초고를 보냈다. 그리고 회신을 기다린 한 달 후, 그 창녀 같은 여자의 이름으로 내 소설이 출간 되었다.
가방디자이너인 주인공이 구두디자이너로 바뀌었고, 새로운 플롯들이 추가되어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그건 내 소설이었다.
나를 더욱 좌절하게 만든 것은 그의 손길로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마법 같은 그의 손이 스친 내 작품은 아름다울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잠시 내 안의 분노와 증오를 잃어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이를 만나면서부터 깊은 영감들이 차올랐어요.' 그 여자의 인터뷰를 보며,
"닥쳐 이 창녀야. 너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순 없어.”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 증오가 불처럼 일었다.
만약 내 글을 그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면 분노가 일었겠지만, 증오가 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작품을 이렇게 아름답게 빚어 그녀에게 송두리째 넘겨주었다.
한번 그에 대한 증오가 일기 시작하자 증오가 증오를 키워냈다.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상황들이
나를 이용하고, 상처 입히고, 버리고, 내 것을 빼앗아간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분노와 증오가 내게 힘을 준 것일까? 나는 그와 나의 이야기를 썼다.
가슴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타자의 속도가 내 마음속 외침의 소리를 따라잡지 못했고,
해야 될 이야기를 마무리 하지 못하고 지쳐 잠드는 것이 안타까웠다.
잠드는 것이 아니라 지쳐 쓰려지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것을 먹었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내 안에서 울려 나오는 절망의 비명소리와 울부짖음을 쏟아 냈다.
내게 이런 초인적인 힘과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삼주 만에 한권의 소설이 완성되었다. ‘
끝’을 쳐 넣으며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몸은 야위고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쇄약 해 져 있었지만 정신은 더 없이 맑았다.
써 놓은 초고를 처음부터 정독해 보았다. 더 이상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히 아름답게 써져 있었다.
그는 출간된 내 책을 읽었으리라.
내 책을 읽고 나서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책이 출판되자 많은 이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작품 속 중년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그리고 예상처럼 그가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긴 질문공세 속에서도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이제 내일 자청했던 인터뷰가 진행된다. 그리고 메일함엔 긴 시간 오지 않던 그의 메일이 도착해 있다.
메일 속에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파일들이 들어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포르노 잡지에서조차 보기 힘든 것들을 내게 요구했고, 그걸 사진으로 찍었다.
내일 인터뷰를 진행하면 내 자신 또한 파멸하게 되리란 걸 나도 알고 있다.
굳이 그 길을 가야하는지 의문이 일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등을 떠밀려 가는 사람처럼 나는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메일을 열어보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열어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편지는 내 가슴에 안겨 뱉어 내던 “너무 힘들어요.” 란 말로 시작되어 있었다.
문장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것처럼 읽기조차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쓰여져 있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여권을 챙겼다. ‘가지 말아요.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론 가지 말아요.’란 말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에게 글은 형벌이었습니다. 하늘은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셨지만,
글을 쓰면 영혼을 잠식당하는 저주를 함께 주었습니다.
20년 전 글을 쓰다 머릿속에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영상들로 자신의 영혼을 작품 속 주인공에서 빼앗겨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 삼년간의 정신과 치료로 자신의 자아를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가 단 한줄의 글이라도 읽게 되면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 일게 될까봐 20년 동안
단 한줄의 글도 읽지 않았다는 그가 나를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들어온 내 블로그에서 행복에 가득 찬 나를 보며 자신도 행복 했었다고 했습니다.
한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던, 단 한순간도 어둠속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자신에게 나는 밝은 햇살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랑을 사랑한다는 내 말이 구원의 계시처럼 들렸다고 했습니다.
평생처음 가져본 소중한 존재를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자신도 너무 아팠다고 했습니다.
어서 빨리 아픔을 주는 일이 멈춰지길, 내가 그토록 쓰고 열망하던 글을 쓸수 있기를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미쳐가며, 죽어가며, 내가 완성된 글을 쓸 수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보다 더 아파하며, 자신의 영혼이 서서히 잠식당해 가는 걸 느끼면서.....
곧 영혼이 잠식당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는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 글로 인터뷰를 대신 합니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고,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코카서스 해변에서 그를 찾을 수 있기를 함께 빌어주세요.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p.s 쓰다가 말았던 글을 마무리 해봅니다.
급히 마무리 하다보니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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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한 일인입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