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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평비(영남평정비)에 대해아시는분.

IP : 6964e0753f23485 날짜 : 조회 : 5228 본문+댓글추천 : 0

영남평비 역사기록을 아시는 해박하신 회원님들이 계시리라보고 여쭙습니다

1등! IP : eee120f699f97b0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 재기불능상태 되다










다시 집권한 소론은 영조가 내심 노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노론의 치죄를 논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살 길은 노론과 공생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나마 영조의 눈치를 보며 집권해있던 소론을 더 난처하게 만든 사건이 집권 1년이 채 안되어 일어났다. 소론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한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과격세력 즉 준소가 경종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의 교체를 기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름 하여 ‘이인좌의 난’이었다.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그 주동자는 지금의 괴산 청천 송면 출신인 이인좌였고,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주도했다. 청주지역에서는 고령신씨(일명 산동신씨) 신천영이 뒤를 따랐다.




이 당시 소론 중에서도 두 개의 당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1720년에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로 앉아 있을 노론이 아니었다.

실권한 노론은 대안(작전?)을 찾았다. 그렇지만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까지 실현하려다가 오히려 축출되었으며 잇따른 목호룡의 고변으로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완소(緩少)로 분열된 것이다.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강경파인 김일경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되자 이에 주군을 잃은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다. 거기에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조의 권력기반이 공고해 지자, 소론측은 더욱 초조감을 느끼게 됐다. 급기야 왕(영조)의 존재를 부정하는 난을 계획하게 된다.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일부 소론 과격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의 급진세력을 포섭하여 영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김일경파의 박필현R28;이유익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영조 즉위 직후부터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지방의 유력 인물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궁중에서는 이하R28;민관효R28;윤덕유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R28;나만치R28;조덕규R28;조상R28;임서호R28;정세윤R28;권서린R28;이호R28;민원보R28;민백효R28;김홍수R28;이일좌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과 중군별장 남태징이 가담했다. 그리고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설의혹을 제기했다. 즉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의 동생 심유현의 말(“주상께선 승하하시기 전 검은 피를 쏟으셨다”)을 빌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곳곳에 이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모반을 정당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동기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영조와 탕평파는 정미환국을 일으켜, 노론의 일부를 후퇴시키고 청남(淸南)과 완소를 정계에 기용함으로써 소론R28;남인을 무마하여, 삼남흉황과 유민의 속출, 노론의 민정실패에 따른 외방의 동요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로써 반남인R28;반소론적인 영조와 노론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약화됨에 따라 일단 서울의 주도층은 거사준비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동조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된 온건소론에 의해 정변모의가 노출되고 급기야 용인에 퇴거해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조정에 고변되기까지 하였다. 최규서의 고변은 이인좌의 난이 실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희빈 장씨의 왕비 책봉을 반대했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650~1735)는 허목이나 송시열보다는 한 세대 이상의 후배로 소론계로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원래 서인이었던 그는 서인이 노소로 갈라졌을 때 나양좌를 옹호하는 등 소론에 가담하였다. 1721년 소론의 영수로서 우의정이 되어 노론 4대신들이 건의하여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철회시켰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하였을 때에도 무사한 그는 이어 좌의정과 영의정이 되었다가 봉조하를 받은 뒤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 경기도 광주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런데 무신난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맨 먼저 조정으로 달려와 이를 알린 다음, ‘역정포고의(逆情布告議)’라는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또한 무인으로 후에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김중만 등은 반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모반자들의 색출을 명령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태추이를 관망하던 이인좌R28;정세윤R28;한세홍 등의 반역세력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이인좌는 영남기병을 정희량R28;김홍수에게 맡기고, 호남기병은 태인현감 박필현에게 맡겼으며, 자신은 정세윤과 경기기병을 추진하여 중도에서 영남병R28;호남병과 합세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세종의 11세손이다. 그는 감사를 지낸 이운징의 손자로 남인명가의 출신이었지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R28;호서R28;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는 한편 남인 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사족과 접촉했다.

또한 정세윤은 정인지의 후손이지만 몰락양반으로 600~700여 명의 세력을 포섭했다. 그는 호남사족층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금영의 조총을 사들여 무장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때 경중주도층은 한세홍을 통하여 거사강행의 소식을 전달받고 군사R28;자금을 모집했으나, 실천의지가 약했다.




영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마침내 반란이 일어났다.

1728년 3월 15일 청주의 이인좌는 자신의 모든 노비 약 1천여 명을 방역한 후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 무리는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 읍성문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성 안에서는 내통자인 양덕부가 성문을 열어줬다. 이들은 청주읍성을 접수하자 성안에 있던 당시 병마절도사(지금의 사단장) 이봉상, 중영의 우두머리 남연년, 이봉상의 비장(지금의 비서실장) 홍림을 살해했다. 이후 이인좌는 여세를 몰아 상당산성을 접수했다. 참고로 백제 때 처음 축성된 상당산성으로 점령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내침에 의해 딱 한번 점령당했다. 바로 이인좌 난이었다.

그리고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하며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였다. 이어 각 창고의 전곡R28;미R28;포를 민간에 분급하고 ‘불살인 불약민재’(不殺人 不掠民財) 및 ‘제역감역’(除役減役)의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민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R28;향임층R28;일반행려R28;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흰옷을 입히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반군은 서울로 북상하였다.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영남병R28;호남병의 합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중내응과 영남병R28;호남병 북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각 처의 유민R28;소상인R28;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R28;죽산으로 진격했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R28;거창R28;합천R28;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토벌되었다. 안동R28;상주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다. 그리고 호남에서는 박필몽과 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한편 정부는 관문R28;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금위영R28;어영청의 군사를 각 진에 파견하여 내성유입을 통제하는 한편, 탁남세력과 윤휴R28;이의징 등의 자손, 김일경R28;목호룡의 가속을 체포했다. 또한 민심동요를 막고자 강창세곡을 성내로 운반했고, 체불했던 공가와 삭료를 지급했으며, 아울러 도성사수론을 내리고 황해R28;강원의 향병징발과 한강수비령을 하달했다.

이런 가운데 북상하던 반군은 3월 24일 안성과 죽산에서 새로 도순무사(변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를 맡기도 하고 지방관들의 비정(秕政)도 살폈던 벼슬)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인좌R28;권서봉R28;목함경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는 창의사인 박민웅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R28;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영조는 잘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조선시대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은 행정적 지위가 즉각 강등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영남평정비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이로 인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은 심한 지역차별을 겪어야 했다. 영조는 1728년 자신을 부정하는 쿠데타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이 지난 1731년에서야 ‘청주목’을 ‘현’으로 강등시켰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소론이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즉 정미환국으로 소론을 등용했기 때문이다. 이인좌는 영조의 즉위로부터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역모를 꾀했는데 영조가 소론을 등용하자 점차 이 계획에서 빠지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 와중에 봉조하 최규서가 고변하는 바람에 이인좌는 치밀한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급하게 거병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이들의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조는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주모자들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소론들이 대거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오히려 소론을 등용했다. 역모 관련자들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소론들은 자파인 이삼을 역모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삼은 임인옥사 때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맡은 포도대장으로서 노론인사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데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조가 즉위하자 이 일로 인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영조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소론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지목하여 반란관련자로 여러 번 제거하려 했으나 영조는 그에 대한 신뢰를 끝없이 보여주는 등 소론을 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난의 진압에는 이처럼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 측 인사였다는 이유로 인해 이후 소론의 입지와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반면, 영조는 이 사건으로 국정의 제1목포로 설정하였던 탕평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해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소론 측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반란이었고, 영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론을 정책에 반영할 명분이 제공된 고마운(?) 반란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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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IP : 6964e0753f23485
네 ~많은도움이되었습니다 장문의 역사글 올려주신 맘대로님 감사드립니다 복사해두었다가 역사드라마볼때 참고하려합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장마철 항상 안출하시고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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