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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펌 - 한국인 "이휘소"

IP : 19921bbd6146570 날짜 : 조회 : 6707 본문+댓글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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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황우석 관련 기사를 보면서 참담한 마음 감출 길이 없네요

그러다 문득 책몇권 정도로만 접했던 분이 생각 납니다.

그의 이름은 이휘소.. 1960년대 전후 세계적인 과학자였으며 아인슈타인과도 비교될정도였던 그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이휘소박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 하자면...

18살때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화학과에 진학했으며 2학년때 노벨상을 받은

논문에서 수학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3학년이 되기전 물리학과로 전과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전과가 불가능했고

마침 주한미군의 추천으로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는데요, 3학년때는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참여하는 수학 수업이 있었는데 너무 어려운

과목이어서 박사과정의 학생들도 줄줄히 포기하는 수업에서 이휘소

박사는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수업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휘소 박사는 이당시 중국음식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담당교수는 이휘소 박사를 가르치기 위해 밤을 새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휘소 박사는 박사시험을 미국 최고의 점수인 평균 93점으로 받았다고 하는데요

역시 미국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점수였고 차점은 71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 석사 과정인데도 노벨상 수상자들을 초청하는 세미나에 미국대표로

초청되어 논문을 발표해서 여러 우수한 물리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4살이라고 하네요...

석사를 마친후 박사과정에서는 여기저기서 같이 연구하자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노벨상을 받은 중국인 양진녕과 이정도등이 러브콜을 보냈고, 노벨상을 받은 겔만은

자기와 같이 연구 할때 자기가 한참 나이가 많지만 오히려 내가 배웠다고 말했답니다.

또 페르미 연구소소장이며 최초의 핵폭탄 제조자인 오펜하이머 소장은 자기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 둘다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양진녕은 이휘소가 이미 60년대 중반에 이휘소에게 노벨상을 주었어야

한다고 한탄했답니다.

이휘소는 당시의 어머니와의 편지 내용을 보면 공부만 열심히 한것이 아니라 조국의

상황을 항상 생각하고 조국의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 비쳤다고 합니다.

그냥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얘기죠...

역대 노벨 수상자들이 한 말입니다..

내밑에 아인쉬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쉬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 전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 오펜하이머-


"이휘소에게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
- 양진녕( 1957년 노벨상 수상자) -

"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 겔만 (1969년 노벨상 수상자) -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할 자리에 내가 있는것이 부끄럽다" - 살람(1979년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


다시 한번 제2 제3의 이휘소 등장을 기대해보며......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천재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과학자 이휘소 박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책속의 그 천재 이휘소 박사


이휘소 박사는 서울대학교 2학년때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논문에서 수학적 중대한 결함을 발견하고 지적한바가 있다. 그는 미국 또한 미국에서 학비를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회피하는 가장 어려운 과목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교수와 함께 6개월동안 1:1로 수업을 해왔다.

수업이 끝나는날 세계적인 수학자인 대학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휘소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 사력을 다해서 밤새워 공부했다" 다시 말해 낮에 아르바이트로 철가방을 들고 중국집 배달을 하면서 뛰는 자기 학생인 이휘소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 대학교수는 일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휘소 [ 李輝昭 , 1935~1977 ]

193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재학 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 후,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72년부터 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이 되고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겸하였다.

1960년대부터 입자의 복합모형이 제창되어 수학의 리군이론이 많이 사용될 때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이후에 와인버그와 A.살람이 입자물리학의 네 힘 중에서 특히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일하여 만든 전기약작용을 재규격화할 수 있다는 이론적 증명을 함으로써 입자물리학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네번째 쿼크인 참쿼크의 존재가 예견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에 대한 국제개발처(AID)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시 귀국하여 한국 물리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州) 국립과학연구소의 초청강사로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42세로 죽었다.


2등! IP : 32c6b0f55c076b9
인재는 많다,
설자리가 없다,
깡패국 말 않들으마
노상객사 혹은 의문사 당한다,,,,,돌ㅃㅣ 초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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