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우리님 원문글에 째즈님에 댓글을 보고 불쾌하여 적어보네요..
"보리 문둥이자슥..
이말은 경상인들을 비하 하는 말이 있습죠.
문둥이라는 함은 나환자를 말 하는데
옛 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인에게는
나환자들이 많았는데 여기서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지구요..
또한 문둥이 앞에 보리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것은
동쪽에 비해 서쪽은 곡창지대가 많아 먹거리가
풍부한 지역이고 반면 경상도의경우 산지가 많아
주식인 쌀을 생산하기 어렵고 보리 농사를 많이
지었습죠..
해서..
경상인들이 이런 핸디캪을 극복하고저 이웃을 탐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습성이 역사적으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져.
이렇게 이해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경상북도 예천군이 고향이니 저 또한 흔히 말씀하시는 보리문둥이 입니다.
위 댓글에서 비하하는 뜻이 아니라고 쓰셨고 저 또한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보리문둥이의 뜻을 왜곡하셔서 쓰셨기에.. 비하를 목적으로 쓰신듯하여 적어드립니다.
"1.경상도를 대표하는 작물 -보리
한국사람들의 주식은 쌀이다 하지만 경상도는 산이 많았다 쌀이 부족할수 밖에 없었고
대체작물로 키운 것이 보리였다 과거기록을 보면 다른지역에서 쌀밥을 먹는시기인 겨울과
봄에도 경상도사람들은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지역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생각할때 먼저연상되는 것이 보리였다
보리문둥이라고 할때의 보리가 여기서 연유했던 것이다.
2.영남의 정치적 소외와 유소, 그리고 문동(文童)
다음은 문둥이의 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문둥이는 문동(文童)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것이다. 그리고 문동이라는 말은 조선후기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남인세력이 주류였던 영남정치세력은 숙종초 기호남인이 몰락하고, 영조초기 이인좌의 난에
적극 가담함으로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이제 정치적으로 실각한 영남남인들이 중앙정계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수 있는수단은
집단상소(유소)뿐이었다
조선은 사림정치를 표방했다 그래서 언로를 개방했고 유생들의 언동에 귀를 기울리고 ,
그것이 조정의 비위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18세기 이후 영남 남인들은 영남의 거의 모든 유생이 서명한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때로는 많은 수의 유생을 확보하기 위해 상소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유생을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한 번의 상소에 만명이 서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영남 남인의 정치적 소외가 뚜렷해질수록 상소에 서명하는 유생 수가 증가하였다.
정조 이후 영남 유생 만명이 서명한 상소라는 의미의 영남만인소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인소가 작성되면 상소의 맨처음에 서명한 이-이를 소두(疏頭)라고 한다-와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유생들이 함께 상경했다. 그리고 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 거리를 활보하였다. 19세기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회적 풍모가 드러났고, 서울 사람들의 옷맵시는 매우 세련되었다.
영남 유생이 쓰는 사투리와 시대에 뒤진 복장은 서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서울 사람들은 상소를 하러 올라온
영남 유생을 보고,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하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회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남 사람하면 ‘보리문동’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분들에 패션감각을 탓하시려면 탓하십시요. 왜곡된 글들로..편가르는 모습 더이상은 보기싫습니다.
경상도 회원님들도..보리문둥이에대한 뜻을 정확히 숙지하시고..자긍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상 어린 보리문둥이 스토커였습니다.
저도째즈님의 댓글을보고 기분좋지못한 1인입니다
다른건 모르겟고 제발 분쟁이나 싸움이생길듯한 발언들은
시작을안했으면 하는바람입니다
누군가 시작하지않는다면 분쟁이없을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