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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결백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주는 감동 - 펌

IP : ce11ee401504d59 날짜 : 조회 : 5190 본문+댓글추천 : 0

청렴결백 ‘저우언라이 총리’가 주는 감동 [파이미디어 2006.01.14 10:03:59] 평생 자신의 옷을 수선해 입었고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인민들과 함께 했던 ‘영원한 인민의 벗’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8일 베이징청년보가 저우언라이 총리의 ‘가규 10조’를 소개했다. ▲후배가 공무를 제쳐 놓고 총리실을 찾게 해서는 안된다. ▲총리 방문자는 모두 국무원 초대소에 묵게 한다. ▲식당에선 모두 줄을 서 밥과 반찬을 타야 한다. ▲극장 갈 때 무료 초대권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초대하거나 선물을 해서는 안된다. ▲공무 차량을 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개인적인 일은 스스로 처리하고 남을 시켜선 안된다. ▲생활을 질박하고 검소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총리와의 관계를 밝혀서는 안된다. ▲사리를 도모해선 안되며 특권층이 돼서는 안된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청렴결백한 생활 습관과 신념이 아닐 수 없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을 화장해 고향산천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사망당시 남긴 유산이 단돈 5000위안(한화 65만원)이었을 정도로 평생 검색한 삶을 살았다. 또한 뛰어난 정치가였던 그를 향해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 마오쩌둥 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평한 바 있다. 마오저뚱의 뒤에서 1인자가 아닌 ‘2인자’의 자리에 서서 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저우언라이의 삶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훌륭한 귀감이 된다. 인간 저우언라이에 대한 보다 깊은 이야기는 <저우언라이평전>(한얼미디어. 2005)를 통해 들을 수 있다. 평생 근검절약했고 가난한 인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헌신했던 저우언라이의 모습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저우언라이는 늘 간부와 병사들에게 민간인들이 국민당 부대의 약탈과 학살 등에 시달려 생활이 피폐해있으므로 민가에 절대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완진(石灣鎭)을 지날 때에는 곡식들이 제대로 추수되지 못해 논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간부들이 그 곡식이 국민당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불살라 버리자고 주장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안 된다. 곡식은 인민의 피와 땀이다. 한 뿌리도 불 태워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본문 중) 인민의 노동을 귀하게 여기고,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던 그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정치인들과는 다른 정치인이었다. 평전은 덩샤오핑 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4개 현대화’ 노선은 이미 저우언라이에 의해 주창된 정책이었음을 밝히고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중국 현대화의 초석을 깔았던 그의 정치행보도 담는다. 정치가로서 그의 협상력은 따를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반둥회의에서 “공통점을 추구하고 차이점을 존중한다”는 원칙 하에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공존’, 즉 ‘평화 5원칙’을 통과시켰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핑퐁외교’를 시작했으며,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성사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저우언라이의 외교는 신중국 외교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 실린 미국과의 위성기지국 설비 협상과정을 통해 쳰치천(錢其琛) 중국 전 외교부장의 이런 평가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협중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매체 전송을 위해 위성기지국 설비를 직접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미국 측이 위성기지국 설비를 가지고 오면 중국이 구매하거나 임대해 외신기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그 비용은 100만 달러가 넘을 것이니 임대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가는 것이 낫다고 제안했다. 그때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단순한 금전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주권과 관계된 문제이다. 미국으로부터 기지국 설비를 임대할 것이며, 임대 기간 동안은 기지국 설비의 소유권은 중국 정부에 속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먼저 중국에 사용 허가를 신청하고, 중국은 미국에 사용료를 청구할 것이다. 사용료는 임대료와 맞먹는 수준일 것이다.” 당찬 저우언라이의 결기에 결국 미국은 저우언라이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중국 중앙문헌 연구실 저우언라이 연구팀장을 역임한 저자 리핑(力平)이 각종 문헌 자료와 기록물들을 통해서 저우언라이의 일생을 재구성한 평전으로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의 정치행보와 삶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파이뉴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따뜻한 사람들의 희망연대 '파이뉴스' 제보 및 보도자료 pimedia.co.kr <저작권자 ⓒ 파이미디어 파이뉴스>


▶1946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옌안(延安)에서 충칭(重慶)으로 타고가던 군용기가 갑자기 고장났다. 기장은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채비를 하라고 했다. 혁명 전우 예팅(葉挺)의 11세 어린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 좌석엔 낙하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우는 자기 낙하산을 벗어 건넸다. “다른 일이라면 저우처럼 할 수 있겠지만 낙하산을 양보한 일만큼은 그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저우의 일본인 친구 오카자키 가헤이타 얘기다. ▶”만약 저우가 내전 중에 우리 편이었다면 마오쩌둥(毛澤東)이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우리가 베이징에 있었을 것이다.” 닉슨이 타이완의 국민당 관료에게 들었다며 저서 ‘지도자들’에 인용한 말이다. 헤밍웨이의 아내로 1941년 저우를 인터뷰한 전쟁 전문기자 마사 겔혼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공산당원 저우”라고 썼다. ‘2인자’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 저우였지만 때로 마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파였던 마오와 달리 저우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했다. 프랑스 유학파 덩샤오핑(鄧小平)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나에게 저우는 언제나 형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혁명의 길로 들어섰고, 그는 동지와 인민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두 사람은 훗날 귀국해서도 와인과 치즈, 크루아상을 즐겼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파리에 들른 덩은 일부러 크루아상을 사와 저우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문화혁명 때 저우는 생명을 걸고 숙청 위기에 몰린 혁명 지도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개혁 개방의 설계자’ 덩과 주더(朱德)도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저우가 보신(保身)에만 신경쓰고 마오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문혁의 피해자였던 원로 펑전(彭眞)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처럼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그는 잠시 몸을 굽혀 장기적인 국익을 추구했다.” ▶지난 8일로 저우언라이 30주기(周忌)를 맞은 중국에선 그에 대한 추도와 칭송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고 한다. 저우가 자신과 가족·친척들에게 요구했던 ‘생활규칙’도 공개됐다. ‘식당에선 줄을 서 밥과 반찬을 타야 한다’ ‘극장 갈 때 무료 초대권을 써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엄하고 남에게 관대했던 면모에서 그가 ‘인민의 총리’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념 대결보다 안팎의 통합과 실리를 추구했던 저우의 삶은 지금 강대국 중국을 떠받치는 실용적 시대정신으로 이어온다. 김기철 논설위원



요즘 정치권이 많이 시끄럽지요
물론 나라와사상과 이념이 틀린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치인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釣 卒 압독


1등! IP : 84228dee50e56da
압독님 반갑 습니다
경산인근에 사시는분 맞나요 저는 진량에 있답니다
좋은정보 유용 하겠네요 유익하게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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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IP : ce11ee401504d59
저두 반갑네요
저의 성장기때는 집이 압량이었구요
지금은 시지에 제 거처가 있습니다.

낚시권은 당연히 경산권이구요
다음에 여유가 되면 같이 함 들이 대보이시더,,,, 조졸 압독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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