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초생달이 구름 뒤에 숨었는가. 어둠이 깊어진 만큼 캐미불빛이 선명해졌다. 의미심장한 순간, 정지했던 1번 캐미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의자에 엉덩이 끝을 걸친 채 두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쥔다. 오너라!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 1번 캐미가 스르륵 오른쪽으로 잠긴다. 빠르되 급하지 않게, 배꼽에서 가슴으로, 회심의 달빛가르기! 챔질의 순간, 원줄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오는 고래의 묵직함. 찰나의 순간에도 폭죽 터지듯 전해오는 상어의 흉폭한 힘. 전율... 크레인이 끌어당기는가. 어떤 떨림조차 없다. 초릿대가 활처럼 휘어진다. 반대쪽으로 틀 수가 없다. 놈은 카본 4호 줄의 인장력과 초릿대의 텐션을 거미줄 헤치듯 무자비하게 뚫어 버린다. 2번 3번 캐미가 쓰러진다. 역부족임을 직감하는 순간 핑!!! 원줄이 끊어진다. 30년 독고다이 질긴 자존심이 허망하게 끊어진다. 항력불가. 불가항력.
파라락!!! 난로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두 손에 2.1칸대를 허망하게 들고, 놈에 의해 한쪽에 몰려 부상당한 여섯 개의 캐미를 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 강간 당한 건가? 뒤이어 쪽팔림의 쓰나미가 왔다. 정리하자면, 오늘이 놈에게 겁탈당한 두 번째 날이지만, 하... 나는 놈의 지느러미는 고사하고 놈의 꼬리조차 보지를 못했다. 놈은 복면을 쓰고 숨소리조차 없이 뒤에서 내 팬티를 벗기고 나를 유린한 것이다. 아아, 이 자괴감을 어이할꼬... 반성도 좀 해보자. 놈은 그저 지나가다 옥수수 한 알을 삼켰을 뿐이고, 그저 가던 길 유유자적 갔을 뿐인데, 참으로 유치하다. 북두칠성 결계가 어떠니 30년 독고다이 내공이 어쩌니 혼자 지랄을 떤 것뿐이고, 놈의 무심초식 한 수에 무릎 꿇은 것뿐이다. 아아, 쪽팔리는 독고다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아침 햇살이 방안에 가득하고, 전날 과음으로 늦게 눈을 뜬 나는 침대에 누워있다. 역광 때문에 그녀의 뒷모습이 실루엣만 보인다. 등 푸른 생선마냥 매끈하다.
- 고등어 같은데요.
- 어, 일어났네? 믄 고등어?
창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한다. 파도소리와 섞인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다.
- 고등어처럼 매끈하다고.
- 극찬이네. 고마워.
- 일찍 일어났네요?
- 응. 맨얼굴 안 보이려고. 근데...
- 근데 뭐요?
- 아, 아니야.
-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하며 그녀 옆에 선다. 그녀가 허벅지를 한껏 벌리고 창틀에 발을 올려놓고 있다. 하얀 다리와 매끈한 허벅지와 울창한 숲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 뭐하는 겁니까?
- 왜, 야해?
- 아니, 묘해.
- 묘해?
- 아니, 야해.
- 깔깔, 해를 품는 거야. 자궁에.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아늑하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이다. 살 냄새가 아득하다.
- 그게... 이런 거구나.
- 뭐가?
- 이유 없이 솔직해지고 싶은 거. 자발적 굴복 뭐 그런 거. 여자들이 내게 했던 말이야. 이게 그거 같아.
- 지금 피터가 그래?
- 그런 거 같아. 아 씨바, 쪽팔리네.
- 아 씨바, 쪽팔리네, 그 말 새벽에도 하더니.
- 내가?
- 깔깔, 술 땜에 안 선다고, 입으로 세워 달래서 해줬더니 잠들기 전에 그러데.
- 아 씨바. 쪽팔려서.
- 이런 말도 했어. 자기 홈피, 외딴방 그만 닫을 거라고.
- 어...
- 깔깔, 그 많은 여자, 이제 어쩌냐?
- 어...
- 고마워.
- 뭐가?
- 솔직해 줘서. 여자 땜에 영혼이 흔들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피터 말.
- 앞으로도 아마 그럴 거야. 그게 안 돼. 뭐 노력도 안 했지만.
- 깔깔, 누가 믿을까. 세상에 피터가 안 섰다고 쪽팔려 하다니.
- 그렇지? 씨바 못생겨서 안 섰어요, 그래야 하는데 말이지.
- 근데, 정말 내가 못생겨서 안 섰어?
- 씨바, 맘에 안 들면 보지도 않는다.
- 피터팬.
- 응?
- 이제 그만 날고 땅으로 내려와. 누나랑 놀자. 피터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어.
- 됐고, 진도 나갑시다. 복수전이다.
됐고, 라고 말했지만 참 난감해졌다. 이 여자는 나를 읽고 있는 듯하다. 외딴방의 비밀글들을 읽은 듯하다. 내가 무얼 고파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씨바, 하며 건들거리는 이면의 유약함이 들킨 듯하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시나브로 말랑해져 버렸다. 머리를 쓸어주던 그녀의 손길도 멈추었고, 아침 햇살에 침묵의 시간이 먼지처럼 가라앉고 있다.
- 피터, 피터야.
- 말해요.
- 화 안 낸다고 약속부터 하고.
- 지금 화낼 기분 아니거든요. 엄청 말랑해졌거든요.
- 저기... 우리 차 바꾸자.
- 왜? 내 똥차가 맘에 들어요?
칼럼이나 수필, 뭐 그딴 거 나부랭이로 가득한 홈페이지가 있다. 어느 날 달린, 비문이고 악문이라고 빈정대던 댓글 하나. 그녀를 만났다. 4살 연상이라는 것 말고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영원은 없다는 거, 변질되지 않는 건 없다는 거,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거 정도만 일치하면 되었으니까. 그녀는 약속 장소에서 멀리 차를 세우고 내게로 걸어왔다. 여자가 타기엔 꽤 큰 차인듯했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내 낡고 오래된 차에 탔다. 이게 피터 차구나, 이게 피터 냄새구나, 하면서.
- 내가 아는 피터는, 아마 이게 마지막인 듯하고, 나는 피터 꺼 뭐라도 가지고 싶고...
- 됐고, 다시 진도 나갑시다.
수풀이 우거진 동굴 앞에서 불가항력, 항력불가, 아 씨바 쪽팔려서... 잠깐 길을 잃는다. 눈이 시리다.
놈이 남긴 흔적을 본다. 원줄들이 미련처럼 엉켜있고 남은 캐미 여섯은 한쪽에 몰려 신음하고 있다. 놈에게 납치된 1번 캐미는 틀림없이 수장당했을 것이다. 담배 연기 사이로 무너미 쪽에서 걸어오는 두 사내가 보인다. 씨름선수처럼 빵이 좋은 친구는 아마 장비일 것이고, 훤칠한 키의 사내는 초면인 듯하다.
- 얼굴은 봤수?
장비가 걸걸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짜식이 인사도 안 해.
- 아니요. 복면을 쓰고 있어서.
두 사내가 눈빛을 주고받는다. 뭐냐, 그 눈빛.
- 반갑습니다. 관웁니다.
초면의 사내가 캔커피를 건네준다.
- 실례지만, 정말 성함이 관웁니까?
- 예.
- 수염은 없지만, 완벽한 관웁니다. 혹 저분은 장비 아닙니까?
- 하하, 별명이 장비 맞습니다. 도둑놈처럼 생겼잖아요.
- 혹 공명도 있습니까?
- 아니요. 왜요?
- 그럼 제가 공명 할랍니다. 반갑습니다. 공명이라고 합니다.
- 클클, 이 양반도 그놈에게 당하더니 맛이 갔...
관우의 눈빛에 장비가 말을 멈춘다. 단순무식에 힘만 좋은 시키!
- 그래, 그놈 힘은 좋지요?
- 여기 지하수 따라 바다에서 고래나 상어가 온 거 아닌가 의심됩니다.
- 하하, 재밌는 말씀이네요.
- 사실, 놈에게 당한 내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운기조식이라고나...
- 푸하하. 이 양반 재미있네.
장비가... 씨바, 쪽팔려서...
- 솔직히 우리도 번번이 당하는데, 아직 얼굴을 못 봤습니다. 본 사람이 없어요.
- 큰형님 있잖아요.
- 아, 그러네. 형님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알고 있는 듯한데, 뭐 말씀을 안 해주십니다. 미리 말하면 영화가 재미없답니다.
- 다행이네요. 저도 직접 보고 싶어졌거든요.
- 아마 한 사나흘은 안 보일 겁니다. 바늘도 빼야 할거고...
22:00
관우와 장비가 떠난 소류지에 바람이 분다. 먹구름이 몰려와 초생달을 가려버렸다. 울렁이는 수면에 캐미 일곱 개를 띄운다.
다시, 독조다. 산속에서 자박자박 새벽이 내려오고 있다...
지루한 글, 잠깐 쉽니다.
- © 1998 ~ 2024 Wolchuck all right reserved. ▲TOP
무척 기다렸습니다.
기다립니다
기다리지 말까요?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려 집니다.
일필휘지.
거침없는 필력에 감탄하고 다음을 고대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팬입니다. ^^*
잘보고 갑니다
그런데 글 간격과 띄어쓰기를 부탁드립니다
따라읽기 힘드네요
먼저 불편을 드려 송구하구요.
정확하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잘 지킨다고 자부해 왔는데...
혹 문단 사이의 간격을 말씀하신 건지요?
그러시다면, 다음 편에는 참고하겠습니다.
일부러 숨 좀 쉬시라고 문장에 쉼표를 많이 넣었는데... ^^*
본 글귀가 생각 납니다.
잉어를 잡으시고
"미안타... 내 여자가 아프다. 집에 같이 가자..."
그 표현을 보고 그 당시
글 고수가 등장 하셨다는 예감을 받았습니다.
1편과 한참 지난 뒤의 2편 ..
역시나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행간 띄우기 부탁드린겁니다. 죄송...
많이 좀 올려주세요. 고등어란 표현이 참 멋지네요.
폰으로, 화장실에서 짬짬 씁니다.
많이 안 나오겠죠? ^^*
글,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