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사님의 조행기에 힘입어 제 어릴적 추억을 얘기해보려 합니다.
저는 올해 세는 나이로 딱 마흔입니다.
나이를 밝히는 이유는 글을 읽으며 시대적 착오가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
아버지는 김포가 고향이시고 어머니는 안산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생선 반찬을 좋아했으며 고기 잡이 또한 좋아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다닌 시기는 국민학교 2-3학년 즈음입니다.
도봉산 자락에 살았던 저로서는 동네 하천에 낚시할만한 데는 없었습니다.
인근 중랑천은 의정부쪽 제지 공장과 도봉동쪽 섬유회사, 전선회사, 라면회사, 조미료 회사가
아주 즐비하게 하천을 끼고 폐수를 내뿜는지라 겨울에도 얼지 않는곳이 많았으며
물은 간장색이었고 가끔 보이는 고기들은 모두 꼬부랑 할머니 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날은 혼자 낚시를 갈 수 없으니 대신 친구들과
도봉산 계곡 -제 아이디말고요 진짜 계곡 ^^- 에 가서 아주 작은 바늘에 50원짜리
밀가루가 주성분인 소시지를 사서 조그맣게 달아서 왕 송사리를 잡고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재미는 있었는데 나름 포인트라고 생각되는곳이 바로 옆에 암자(조그마한절)가 있던터라
그곳 스님에게 걸리면 영락없이 불호령이 떨어져서 깡다구 없는 친구들은 꺼려했습니다.
아버지는 철도청 공무원이셧습니다. 비번이신 날에는 교외선을 타고 일영유원지도 가고
경원선을 타고 전곡도 다니며 하루 짬낚을 즐겼습니다. 물론 기차는 공짜로 타고 다녔지요.
요즘처럼 무료 승차권이 있는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직원 수첩을 보여주시며 역무원에게
"수고하십니다." 한 마디 하시면 그만이었습니다. ^^
낚시가 목적이 아닐때에도 주말이면 아버지와 기차 드라이브를 즐겼습니다.
망월사역에서 한시간 마다 오는 교외선을 타고 터널을 지날때 실내등이 들어오면서 터널을 빠져나갈때는
어김없이 "빠앙" 하며 울리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무척 재미나서 하루에도 두번 세번 졸라서 탈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교외선 경원선 모두 아주 오래된 기차였는데 아버지 말로는 일본에서 고물된걸 비싼돈주고
들여와 다시 돈주고 고쳐서 쓰는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칸은 요즘 전철처럼 양 옆으로 기다랗게 의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칸은 일반 기차처럼 마주보고 앉게 되어있기도 했습니다.
이것 저것 제짝 아닌걸 마구 짜맞추어 다닌걸까요???
아무튼 제일 고역이 담배였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는 담배에
관대했던 시절이라 어른이면 당연히 담배를 피고 술도 할 줄 알아야 했고
기차내부에도 좌석마다 버젓이 재떨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위생에 예민하던 시절이 아니어서인지 애가 있건 산모가 있건 어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뽐내듯이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물론 요즘보다 좋았던 점은 자신보다 연배가 아주 많아보이면 아는 분이던 모르는 분이던
면전에서 담배를 안피웠다는 것이죠.
요건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도 출조 갔다가 어르신이 옆자리 앉으시면 솔직히 담배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 고행을
감수하기도 한답니다. ^^
아무튼 일영유원지로 낚시를 갈때면 아주 단촐한 짬낚입니다.
1.5칸 단절대에 빨대찌, 금바늘, 떡밥 두어봉지, 지롱이 한통, 도시락.....
아버지와 제것 2인분의 짐을 꾸려도 아주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지금은 장흥 카페촌도 두물, 세물 갔지만 그때는 장흥은 그냥 산이었습니다. ^^
일영 유원지도 넓은 평상 한개씩 개울쪽에 놓은 가게들 두세개가 전부였고
별로 알려진 동네도 아니었습니다.
일영기차역에 내려 개찰구를 지나 역 맞은편에는 낚시가게 하나, 슈퍼 하나, 평상있는 음식점
두군데 정도가 있었으며 스레트 지붕의 단층집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 사시는 할머니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가끔 들려 식사도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시락을 싸온 날은 음식점 평상에 앉아 낚시 하기전 식사를 했는데 주인아주머니는 식사를 시키지도 않고
도시락을 먹은 저희에게 전혀 거리낌 없이 시원한 냉수도 갖다 주시며 아버지랑 놀러 다니는 제가
키도 크고 착하게 생겼다며 방그레 웃어주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인심입니다.
평상 음식점 뒤로 흐르는 개천은 지금은 장마때가 아니면 수량이 거의 없어 낚시가 힘들지만
그때는 장마 전에도 수심이 1.5칸 기준으로 1-1.5m 정도 되는 곳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떡밥 제조법은 콩가루와 깻묵, 그리고 밀가루를 약간 섞는 것이었습니다.
그후로 군대 제대후 차몰고 혼자 낚시 다닐때까지 저의 떡밥 제조법도 그러했습니다. ^^
물 반 고기반이던 시절이어서인지 몰라도 낮 낚시에 큰 붕어는 잡히지 않았지만 불거지 보다
조금 커서 붕어 체면 세우는 정도의 씨알로 보통 한시간에 3-4마리씩 정도는 잡혔던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찌맞춤을 해서 낚시를 했던게 아니고 낚시가게에서 주는 봉돌 양 옆으로 빨간색 빨대가
벌어져 있는 2봉 채비를 썼는데 아버지는 나름대로 조금씩 깎으셨던 기억이......
저는 찌만 가라 앉으면 그냥 했습니다. ^^
아버지도 어릴적 민물낚시를 정도로 배우신게 아니라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몰래 바늘을 빼와서
요령있게 구부려서 수수깡 끼워 붕어도 잡고 장어도 잡고 망둥어도 잡고 하셨다 하니
제대로 된 찌맞춤과 채비법을 제게 전수해 주실 수 있는 실력은 아니셨던것 같고.
형이 중학교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인지 막내인 저를 데리고 다니시며
나들이 다니시는게 맏이를 못보는 위안이 되서 좋으셨던것 같습니다.
아무튼, 채비가 이렇다 보니 흔히 말하는 입질 시 슬로우 비디오로 찌를 올리는 붕어는
당연히 거의 없었고 저 또한 나이가 어리다 보니 집중을 계속 할 리도 만무한지라
채비 던져놓고 동네 아이들과 떠들고 놀기 일쑤였고, 어쩌다 찌를 찾아 보는데 마침 찌가
쑥쑥 박히고 있거나 아무리 찌를 찾아도 안보이길래 대를 들어보니 고기가 걸려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ㅎㅎㅎ
아버지는 지렁이를 달아서 빠가사리를 잡는걸 좋아하셨는데 저는 고기를 떼어내기가 무섭고
자신이 없어서 지렁이는 잘 쓰지 않았습니다.
가끔 큰 고기가 물거나 잉어가 걸려서 한눈을 자주 팔던 저로서는 고기에게 낚시대를 뺏긴적도
여러번 있는데 주변 낚시하시는 어른들의 성화에도 아랑곳 않고
팬티까지 벗고 물에 들어가 건저오곤 했구요. 어떨땐 어른들이 뺏긴 낚시대 건져 달라며
부탁들을 하셔서 대놓고 용돈벌이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물을 한 번 휘저어 놓으면 어른들은 한 두시간은 낚시를 접고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오셔서
안면 있는 분들끼리 마시며 쉬셨고 주당이신 저희 아버지도 마다 않고 참석을 하셨습니다.
가끔 빠가사리나 모레무지, 동사리등을 제법 잡은 날에는 자주 얼굴 뵙는 동네 분들과 어울려서
매운탕에 술을 얼큰하게 드시기가 일쑤였는데 그런날은 술판이 길어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저도 나름대로 동네 아이들과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며 놀다가 어르신들이 주시는 용돈으로
군것질도 하며 좋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갈때는 날이 저물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기차를 타고
아버지를 부축하고 가방을 짊어지고 역무원에게 기차를 공짜로 타는 이유를 설명하며
"수고하십니다." 하고 아버지 하시던 마냥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역무원 아저씬
아버지 잘 모시고 가라면서 빙긋 웃어주셨습니다.
어떤날에는 너무 늦어 기차 시간이 끊기면 역무원 아저씨가 파출소에 연락을 주셔서
순찰차를 타고 집까지 타고 온적도 있었습니다.
딱 두번인가 그랬는데 순경 아저씨는 죄송하다며 연신 굽신거리는 어머니께
"같은 공무원끼리 도와야죠! 걱정말고 잘 모시세요" 하시곤 부리나케 다시 돌아가셨는데
제 입장에서도 참 난처했던 경험이었습니다.
80년대 초반, 군인이나 경찰이 끝발 날리던 시대임을 실감케 하는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
어느덧 시간이 많이도 흘러 아버지는 은퇴하신지가 15년이 되셨고 저 또한 삶의 무게를
느끼는 가장이 되었지만 어릴적 아버지와의 추억은 힘든 일상의 잠시 숨통을 트는 청량제가 되며
살아가는 소중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올해 봄에 문득 짬이 되어 일영역을 찾아가 보았지만 더이상 기차는 다니질 않더군요.
2010년도인가 즈음에 운행이 중단되었다더군요.
강산이 바뀌어 흥했던 일영 유원지 옆동네 장흥도 이제는 시들해졌고.
운행이 멈춤 일영역에는 군인들만 삼삼 오오 모여 독도법 훈련을 하고 있더라구요.
어릴적 이후로는 와보지를 않아서 일영 유원지가 얼마나 흥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와 낚시했던 포인트는 물론이고 간당 간당 흐르는 발목 접히게 얕은 수량을 보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 변함이 없다면 추억도 그리 아름답지 않을거란 자위를 해보며
어릴적 그때를 회상해봅니다.
아버지는 칠순 중반이 되셨지만 아직도 기차를 타고 낚시를 다니십니다.
이제는 인근엔 맘편히 다니실데가 없으셔서 멀리 연천이나 대마리까지 다니시지만
워낙 정정하신지라 주말 빼곤 매일 다니시네요 ^^
두서없는 글이 기존 조사님들의 조행기의 격에 참으로 위배되지 않을까 몇 번을 망설였네요.
저보다 연배이신 횐님들이 대부분이시겠지만 제 나이 또한 요런 추억들은 갖고 있답니다. ^^
이제 장마가 얼마 안남았네요.
모든 횐님들 낚시보단 가족과 건강을 먼저 보살피시고요.
저 또한 그러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사무실에서 당직서던 도봉산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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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쓴님보다 10년정도 더 살았으니 그때는 더 천연적이었지요....
온가족이 의정부역에서 기차타고 장흥역까지 솥단지, 화문석 돗자리, 석유곤로를 지고이고 캠핑가던
생각이 아른합니다....
동대구역 새벽4시발 완행열차타고
영천 봉정역에 내려서
근처 가게에서 아버님은 막걸리드시고ㅡ
저는 음료수나 빵 같은걸 먹고
배를채운뒤 아버님따라
강으로 한참을 걸어갔었죠
이제 아버님도 안계시고
옛날이 무척 그립네요
저도 도봉산계곡님과 비슷한 연배입니다
정정하신 아버님이 계시다니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실 겁니다.
소리없이 눈물이...
저도20 대 때 장흥, 송추 용미리 쪽으로 낚시를 가끔 갔었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군요 아련하게 옛 생각이 납니다^^
추천~~~ 꾹
저런 추억 있는분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월척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