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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에 독도는 어떤식으로 표현됐는지 궁금합니다.

IP : e4a338b8b39762e 날짜 : 조회 : 3313 본문+댓글추천 : 0

요즘 독도 때문에 연일 시끄러운데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 고시 라는 것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자기네들 영토로 일방적으로 편입한건 아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독도는 어떻게 표현됐는지 궁금합니다.

1등! IP : 7ecfcf223dede98
)512년 신라 지방군주 이사부 우산국(울릉도).독도 한반도 역사 편입.
2)고려사와 세종실록, 울진현의 정동 해중(海中)에 우산.무릉도 기록
3)1785년 일본 하야시의‘삼국통람도설’ 울릉도.독도를 조선영토로 표기
4)1877년 일본 태정관, 내무성에 ‘독도는 우리와 관계없다’는 지령문
5)1900년 울릉 군수의 관할 구역으로 ‘석도(石島, 독도 지칭)를 포함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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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왔읍니다 저도 처음 알았네요 반성합니다

독도는 우라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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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IP : 7e86d2999433df9
일본본토동경을향해서대포동미사일이김정일이름으로대기중이며...
백두산천지안에선코리아라는이름으로로보트태권브이가출격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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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ae403fbd88cb4c3
독도에 대해 긴글이래도 읽어주시길 바랩니다


일본이 한국 땅 독도에 대해 처음으로 행정적으로 일본 땅에 편입시킨 출발점은 러일 전쟁시기에 독도를 군수보급통로로 활용하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서부터다. 1904년 8월 강제 한일협약이 체결되고나서 각의 결정 후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조례 고시(告示) 40호를 발하여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일방 편입시켰다.

정작 분쟁의 시발점은 그 이후에 발생하게 된다. 1945년 한국이 광복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귀속하고, 1952년 1월 18일에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에서 한국 영토 범위를 명확히 하게 된다.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하면서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국가의 권리 전개 과정에서 일본은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도와 관련한 영토침략을 노골화 하게 한다.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 침략의도는 국제법상 선점논리에 따르게 된다. 즉, 1)선점의 대상이 되는 지역이 주인 없는 땅이어야 하고, 2)선점 주체가 국가이어야 하며, 3)선점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4)그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해야만 선점이 인정된다는 논리를 내세우게 된다.

일본이 내세우는 강력한 증거는 조선정부가 1416년(태종 16년)에 이른 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해서 그 이후로 조선은 독도에 대한 선점의사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것은 국제법 판결 관례에 따라 100년, 200년, 300년 동안 점유 해야만 영토로 인정된다는 국제법 기준에 맞추려고 수 백년 동안 독도는 조선의 선점이 없는 상태에서 버려진 섬이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러한 일본의 독도침략 주장에 대해 한국은 1416년 이후 부터 1905년까지의 실질적인 독도 점유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 기간동안 독도가 일본 정부에 의해 국제법상 일부 인정되는 백년 이상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것과, 1416년(태종 16년)부터 일본이 선점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왜인들의 실효적 이주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于山(독도)과 무릉(울릉)의 二島가 縣(울진현)正東의 바다 가운데 있다. 이도(二島)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7년(1476년)에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보낸 영흥인(永興人) 김자주(金自周)등 12명이 삼봉(三峰)을 돌아보고 글을 올렸지만 왜인의 거주사실에 대한 보고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1696년(숙종 22)에 안용복이 일본정부에 의해 독도의 소유권을 인정 받았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그러나 안용복의 점유권 주장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인정한 부분에 관해서 일본이 반박자료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 학자 나이토 세이추의 논문에 등장하는 사료를 근거로 1695년 막부와 지방조직인 도토리 번이 주고 받은 공문 내용도 앞세우고 있다. 1693년 울릉도 근해에서 조선인이 일본 어민에게 납치되자 조선정부는 왜국 막부와 2년에 걸쳐 영유권 논쟁끝에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 받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막부가 '언제부터 울릉도가 도토리번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도토리현은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섬이 아니다'라고 답신한다. 막부는 1696년부터 도토리현 어민들이 울릉도 도항을 금하게 된다. -도토리 현립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도토리 번사.
그리고 나이토 세이추는 1877년 메이지 정부가 시마네현에 보낸 공문서의 내용을 근거로 독도는 왜국과 상관이 없다는 내용을 보여줬고, 1900년 대한제국 칙령으로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이미 규정했으며 일본인들의 독도 상륙은 1년 중 열흘도 되지 않았다는 것과 당시 시마네현마저도 새로운 섬이라고 부르는 혼동을 보이는 등 선점의식의 비논리성이 존재한다.)

1794년 정조실록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하여 가지도(可支島)라고 불리다가 1882년(고종 19년) 울릉도 개척이후 울릉도 주민에 의해 독도로 불리게 되면서 1906년(광무10년) 울릉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 내용에서 병오 음력 3월5일조에 본군소속 독도라는 문헌적 기록이 나타난다.

1785년(에도시대 중엽)에 작성된 일본 지리학자 하야시 시혜이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에 명백하게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이소다찌라는 말은 두 개의 섬이 한 곳에 있다는 의미로 뭉퉁거려 하나의 섬으로 표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공식 문서다.




1876년 일본은 내무성 명의로 일본지도 제작에 나서 각 현에 지도와 지적도 작성을 지시했는데, 시네마현이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시킬지에 대한 여부를 묻자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와 조선의 문서를 참작하여 조선영토임을 인정하였고, 내무성이 다시 상부기관인 태정관에 문의하자 태정관은 최종적으로 1877년 3월 20일자로 조선영토임을 인정하는 훈령을 내려 보내고, 내무성은 이를 근거로 하여 1877년 4월 9일자로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알리는 훈령을 내려 보냈다.





1900년10월25일 대한제국 칙령 41호 제2조로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표하며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불법침입을 근절시키도록 하고 있다.

연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지도로서 1908년(융희2년)에 일본에 의해 제작된 한국수산지(水産誌)에도 제1호 제1편에 독도를 울릉도와 같이 분명하게 한국영토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적극적으로 사법재판소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가져가려고 했고, 한국은 소극적 입장에서 거부하는 자세를 암묵적으로 취했다. 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담당할 강대국들에게 한국의 역사적 사실들만을 내밀어 봐야 한국의 일방적인 주장 밖에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 것은 바로 패전국 일본의 영토를 규정하는 승전국들의 회의 기록에서 그 동안 명확하게 한국과 일본의 영토를 구분해 놓은 기록적 근거가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영토구분 지도가 없었기에 분쟁이 소극적으로 펼쳐진 이유는 한국은 국제법상의 충족 요건인 100년 이상 실질적 선점이라는 조건충족을 위한 속내도 있었고, 일본은 자꾸만 이의 제기를 함으로써 선점충족 원인을 무효화 시키려고 해왔던 것 때문이다.



일본에게 승리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 1.29 SCAPIN 제677호제3항에서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는 섬들의 (a)그룹으로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포함시켜 미군정에 이관하였다.



비록 영국 외무부가 1951년 3월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킨 지도를 제작해 미국에 보냈으나 공식 조약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회담에 등장하는 유일한 공식지도다. 이 것은 당시 승전국들이자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실질적 판결 주체들인 이들 국가들을 설득하여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합법적 증거물이 될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독도침략 정당성을 위해 인용하면서 사실관계 출처는 밝혔지만 지도는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언론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의 경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기준해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규정하여 ‘일본영역도’를 1952년에 제작 배포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했다.



독도는 단순하게 사람이 살 수 있는가만 따지면 부동산적인 가치는 없다. 하지만 국제해양재판소의 생물과 비생물로 구분되는 자원에 관해 명시한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영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로 경제적 탐사와 개발이라는 것이다. 독도를 얻음으로써 더 넓은 바다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그 바다를 통해 더 많은 민족적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우기 독도는 만년의 역사를 이어 온 혈통적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수 천년을 이어 온 역사적 선조들의 땀과 피가 서려 있는 민족의 정기가 끝까지 치달은 대한민족의 숨결이 배어 숨쉬고 있는 곳이다.
한 치의 땅을 양보하면 마지막 한 치의 땅마저도 잃게 되는 것이다. 땅은 어머니이다. 민족을 길러주고 미래를 열어주는 모태인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를 사랑하듯 우리의 영토를 사랑하는 것이다. 땅이 없는 민족은 사라지고 만다. 또한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땅은 타인의 영토일 뿐이다.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일본넘들처럼
독도분쟁이 마치 김대중 전대통령 때문에 생긴일이라고 우기는분들 부디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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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241add82219fc6c
역시 한겨레
친일 이승만박정희가 독도분쟁빌미를제공하고
독도를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고 김대중대통령을
깍아내리는 일부몰지각한 분들의 거짖선동을 이해할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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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91b5c115f09b760
오늘 뉴스를 보니 이명박이가 독도에 비석을 세웠다지요.

한쪽면은 "대한민국"한쪽면은 "독도" 한쪽면은 "대통령 이명박"

비석에 자기 이름을 넣고 싶었나 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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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fcc0a4ffb0efabc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한겨례 논설위원chankb@hani.co.kr

과거사에서는 거론의 여지 없이 독도는 조선땅,
현대사에서 경제개발 5 개 년 계획이라는 명목하에 독도를 공동구역으로 팔아 먹은 것.
그래서 일본놈들은 "국제재판소" 가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고,
우리나라는 "국제재판소" 재판형식이 재판당사자가 공동으로 재소해야 진행되므로 너 혼자 하라고 빼고있는 상황.
하지만 밀약에서도 한국의 점유는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있어 일본놈들이 실질적 점유는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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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ae403fbd88cb4c3
독도 문제에대해 북한에서도 한마디 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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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이날 '독도가 누구 땅인데 생떼질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반동들이 남조선 집권자의 독도 시찰을 계기로 날강도의 본색을 다시금 드러내고 있다"고 일본을 비난했다.

노동신문은 "그들은 앙앙불락(마음에 안차고 아속함)하면서 정부급 교류중단과 서울주재 자국대사소환,
야스구니 신사참배, 대북공조중단 등 일련의 강경카드들을 연이어 꺼내드는가 하면
국제사법재판소제소까지 운운하며 분주탕(소란)을 피우고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신문은 또
"이번 기회에 독도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국제분쟁화하는 동시에
독도강탈에 필수적인 실무적 조치들을 취하자는 것이 그들의 간특한 기도"라며
"일본이 도처에서 남의 영토를 제 것이라고 우겨대며 소란을 피우고있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독도문제와 관련한 추태는 실로 터무니없는 망동"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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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 b332b3a4d90c136
일본제국주의가 독도를 침탈하는 과정은 '독도실록1905'라는 책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입니다. 울릉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인 한 독도도 역시 우리나라의 영토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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