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을 보냈지만 회신의 간격이 열흘에서 보름으로 지연되고 있었다.
내가 보내는 편지는 일기형식을 빌어 계속 발송을 했다.
남녀사이는 고무줄처럼 양쪽에서 균형 잡힌 힘을 가하면 탱탱하게 긴장을 유지하지만,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당기면 고무줄이 터져 버린다는 고참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내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계속 편지공세를 취했지만 그녀의 편지는 중단되어 버렸다.
원인이나 내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 홀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상처 난 짐승처럼, 가슴은 검게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말번 전초를 나갔다가 들어와, 잠을 다시 청하지도 못하고 모포를 덮어 쓰고 누워 있었다.
몸을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혜림을 만났다.
그녀는 면회 왔던 그 차림 그대로였다.
내게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을 보니 무슨 말을 하는데 내가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무반을 울리는 기상나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아침점호를 마치고 구보를 하면서도 그 꿈 내용에 안절부절 했다.
화생방 교육장에서 오전 교육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 후, 오후 학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무병이 오늘 도착한 편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반가움과 기쁨에 고함치는 소리가 여기 저기 들렸다.
나누어 주는 손에는 마지막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오늘도 오지 않았다고 포기를 하려는 순간에 내 이름이 불려졌다.
윤 혜림!
윤 혜림!
그녀의 편지였다. 정신없이 개봉을 했다.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지고 있었다.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 왔다.
눈을 뜨고 보니 링거 병이 달려 있고 의무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무대 양 병장이 나를 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야, 임마! 애인이 이민 간다는 편지를 받고 졸도하는 자식은 우리 부대 창설 이후 네놈이 처음이란다. 허우대는 멀쩡한 놈이 너 대학 재학 중에 입대했지?”
“예!”
“학교 다니다 온 자식들은 모두 물러 터져 가지고는....... 애인 절교 편지를 대한민국 군바리 중에 너만 받은 줄 아니? 특명 받은 나도 과거사 이야기고, 지금은 전설이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참담하고 초라한 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양 병장은 침대에 걸터앉아 내 어깨를 감싸고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여자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보다 많다. ‘앉아 쏴’하는 동물과 ‘서서 쏴’하는 동물은 생리적인 구조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른 거야.”
약학대학을 휴학하고 입대한 양 병장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한번 차여 봐야 인생의 참 의미를 안다고 거듭 강조를 했다.
군대 생활의 한정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여자는 속물이고, 남자의 인생을 그런 여자에게 건다는 건 남자의 그릇문제라고 했다.
편지를 읽다가 침상에서 쓰러져 의무대로 옮겨 온 것을 양병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알았다.
양병장이 알약을 들고 와 물 컵과 같이 내밀었다.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신경 안정제인 것 같았다.
저녁을 굶고 잠에 골아 떨어졌나 보다.
일어나 벽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머리맡에 있는 소형 전기스탠드 스위치를 눌렀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혜림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나갔다.
가족의 이민결정은 아버지의 퇴임과 미국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것 같았다.
면회를 와서 나에게 하던 말들을 되돌려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렸지만 모든 의미가 내포된 것이었다.
수증기처럼 증발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이야기와 정말 사랑하느냐는 물음도 지금을 미리 염두에 두고 했던 것 같았다.
가슴속에 있는 정작 해야 할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떠나갔다.
한정된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어느 여자가 기댈 수 있느냐고 악센트를 주며 몇 번이나 강조 했던 이야기는 결국 혜림이 떠나더라도 군 생활을 잘 하라고 한 말이었다.
반지와 목걸이는 영원히 간직하며, 여자의 순결한 순수성을 드린 건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의미로 받아 달라고 했다.
가족이 모두가 이민을 가더라도 분명히 돌아온다는 약속의 말도 몇 차례나 언급을 했다.
보름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고참들과 동기들이 수시로 의무대에 올라와 온갖 이야기를 하고 내려갔다.
특히 결혼을 하고 첫딸을 두고 입대한 행정반의 김 상병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군대 생활의 짬밥으로 몸무게가 늘어가는 만큼 혜림에게 받은 충격의 강도는 반대로 묽어지고 있었다.
내 젊음의 화려했던 날은 상처를 받은 채 그렇게 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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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인생을 그런 여자에게 건다는건 남자의 그릇문제라고.."
^^** 입질기다림님은 어떤 그릇일지 궁금합니다 ㅎㅎㅎ
재미나게 잘 보고있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20대 피 끓는 군인아저씨일 때 첫사랑은 정말 세상의 전부이거든요.
세상 전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순진한 남자에게, 위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그릇인지 궁금하시다니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네요.
옛날에는 양은냄비였지 싶은 생각이 들고, 지금은 투박한 질그릇입니다.
늘 좋은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