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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터의 어린 왕자

IP : 25297cccde4f02f 날짜 : 조회 : 5569 본문+댓글추천 : 1

낚시터의 어린 왕자 "아저씨! 예쁜 붕어 한 마리만 잡아 줘." 낚시의자에 앉아 깜박 졸았나 보다.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늦가을의 햇살을 등에 지고, 흐트러진 갈대꽃을 머리에 이고, 목에는 머플러를 바람에 휘날리며 어린 왕자가 서 있었다. "뭐라고 했니?" 어린 왕자의 말을 들었지만 다시 물었다. "붕어 한 마리만 잡아 쥐, 토종붕어를." 어린 왕자의 손에는 접지도 않은 낚시대가 들려 있었다. 낚시줄은 낡았고 찌는 동강나 있었으며 봉돌은 무거워 보였다. "어디서 왔니?" "먼데서 왔어." "이리와, 내 옆에 앉아." 나의 의자에 어린 왕자를 앉히고 차에서 예비의자를 가져와 내가 앉았다. 어린 왕자는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낚시대를 이리 주렴. 내가 던져 줄테니." 어린 왕자가 내미는 낚시대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던지려고 보니 찌가 부러져 쓸 수가 없었다. 찌통에서 작은 찌를 꺼내 부력을 맞추어 달았다. "떡밥은 여기에 있어." 어린 왕자는 손에 쥐고 있던 떡밥을 내 밀었다. 떡밥이 말라있어 다시 반죽을 하고 바늘에 달아 수초 옆에 던져 넣었다. "너 배고프지 않니?" "응 배고파!" 나는 가방 속에서 빵을 꺼내 손에 쥐어주고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다른 손에 쥐어 주었다. 어린 왕자는 배가 고팠던지 재빠르게 빵과 커피를 먹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돌려 찌를 바라보곤 하였다. "아저씬 붕어를 몇 마리나 잡았어?" "아직 못 잡았어." "여기는 토종이 있어?" "글세, 아직 잡아보지를 못했어." 그 때 어린 왕자의 찌가 살며시 올라왔다. 어린 왕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가볍게 챔질을 하니 피라미가 딸려 나왔다. "에이, 피라미야." 어린 왕자는 피라미를 살며시 뽑아서 물에 놓아주었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토종붕어가 없어, 나쁜 사람들이 그물로 다 잡아갔어." 어린 왕자는 물위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말했다. 가을해가 산 위에 비스듬히 걸리고 쌀쌀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너 집에 가지 않아도 되니?" "응, 붕어를 잡지 않으면 안 갈거야." "날씨가 추울텐데." "며칠째 밤을 세웠는데 견딜만 했어." 나는 케미를 꺽어 내 낚시대와 어린 왕자의 낚시대에 달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황소개구리가 우는 걸 보니, 여기도 그 놈들이 있나보군. 황소개구리가 붕어를 다 잡아 먹어. 우는 소리도 징그러워." "그래 황소개구리를 다 잡아 없애야 하는데..." 그 때 어린 왕자의 찌가 또 올라오더니 살그머니 옆으로 흘렀다. 어린 왕자는 챔질을 하더니 붕어를 꺼내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 놈은 떡붕어야. 떡붕어가 판을 치고 있어. 토종은 볼 수가 없어." 어린 왕자는 다시 붕어를 물 속에 놓아주었다. "어떤 못에는 부루길이 덤벼들어 낚시를 할 수가 없어. 지렁이를 넣으면 마구 물고 들어가. 토종은 정말 보기 힘들어..." "그렇지, 또 배스란 놈이 토종붕어의 알과 어린고기들을 잡아먹어 토종은 자꾸만 사라져 가지." "그게 다 어른들이 잘못해서 그래. 황소개구리, 떡붕어, 부루길, 배스를 왜 가져 왔는지 알 수가 없어." "이제는 중국산 붕어도 들어오고 있단다." "어른들은 자기 생각만 해서 그래. 돈만 생각해. 우리 걸 지켜야 하는데 말야." 어린 왕자는 가슴을 헐떡이며 흥분을 하고 있었다. "어! 아저씨 찌가 올라 왔어." 어린 왕자가 어둠 속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내 찌가 올라와 이미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챔질을 했다. 엄청 난 힘이 대를 타고 흘러 왔다. 대를 세우고 수초를 피해 놈을 물가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뜰채는 여기 있어." 어린 왕자가 어느새 뜰채를 들고 등뒤에 서 있었다. "네가 뜰채를 대렴." 어린 왕자가 뜰채를 물 속에 넣고 기다렸다. 놈을 뜰채 속으로 유인하여 밖으로 끌어냈다. 4짜가 되어 보인다. 낚시 30년만에 4짜 조사가 되는 순간이다. 후둘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에서 바늘을 빼내려는데, 어린 왕자가 렌턴을 비추며 말했다. "아저씨! 수염이 달렸잖아." 깜짝 놀라 아가미를 보니 기다란 수염이 달려 있었다. "잉어는 놓아 줘, 여기도 토종붕어는 없나 봐." 어둠 속에서 어린 왕자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또 기다려 보자. 어쩌면 커다란 토종붕어가 잡힐지 몰라." 다시 새우를 달아 던져 놓고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아저씨가 여기에 청소를 했나 봐." "응 내가 미리 청소를 좀 했어." "다른 곳에는 냄새가 나서 앉을 수도 없어. 온통 쓰레기 뿐이야. 어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어린 왕자는 성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조금씩만 청소를 하면 되는데, 그리고 저수지 위에는 가축을 기르지 못하게 해야 돼. 아니면 더러운 물이 못 흘러오게 하던지..." "글세, 조금씩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꾸만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이야." "모두가 어른들 책임이야." "넌 많은 곳은 다닌 모양이구나." "응 토종붕어를 잡으려고 안 간 곳이 없어. 어떤 곳에는 떡붕어나 중국붕어를 넣어 놓고 돈을 받는 곳도 있어." "응 양어장이거나 유료낚시터야." "왜 어른들이 마음대로 돈을 받아. 그냥 두면 아무나 낚시를 하면 되는데...." "그냥 두면 자꾸만 더럽혀 지니까 그렇지." "그게 다 어른들이 잘 못해서 그래. 저수지가 뭐 자기들 것이야? 돈을 받고 사고 팔기도 한다고 들었어, 맞아?" 어린 왕자는 또 가슴을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늘에 길게 유성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별들이 내려와 물위에 앉았다. 한쪽에서 물오리가 헤엄을 치니 별들이 깨어져 흩어졌다. 어린 왕자는 지쳤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의자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차에서 모포를 가져와 어린 왕자를 덮어 주었다. 물 속에서 파란빛을 품어내던 케미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린 왕자는 토종붕어를 찾아서 며칠씩이나 헤매고 다닌 탓인지 잠든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달빛에 보이는 어린 왕자의 얼굴은 평화스러워 보였다. 먼동이 트고 요란한 새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깰 무렵, 어린 왕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저씨, 붕어를 잡았어?" "아니, 오늘도 입질을 않는군." "여기도 토종붕어가 없나 봐." 어린 왕자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이슬에 젖은 수초를 번갈아 보았다. 발아래 핀 들국화를 한 송이 꺾어서 내 모자에 꽂았다. "나는 들국화를 좋아해, 들에서 피는 꽃들은 향기가 좋아." 아침햇살이 들녘에 퍼졌다. 이슬이 햇살에 반짝였다. 어린 왕자는 낚시대를 접었다. "왜? 갈려고 그래." "응, 여기도 예쁜 토종붕어는 없어." "하루를 더 해보면 잡힐지 몰라." 어린 왕자는 말없이 대를 접은 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저씨, 어디가면 토종이 있을까?"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글쎄다. 나도 잡아본지가 워낙 오래 되어서... 산속 소류지로 한번 가 보렴." "그런 곳 다 가봤어. 아무데도 토종은 없어." "그럼, 어디로 갈건데...." "그냥 아무 곳이나..." 어린 왕자는 뚝 위에 올라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린 왕자는 아침햇살을 등지고, 흐트러진 갈대꽃을 머리에 이고, 목에는 머풀러를 길게 늘어뜨리고 들국화가 핀 들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토종은 아무데도 없어!" 어린 왕자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어린 왕자가 걸어간 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끝) ps: 어린 왕자가 말했다. "텍쥐베리 아저씨가 하늘나라에서 이 글을 읽으면 무지 웃을꺼야."